신령한 복
3절을 보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흔히 민간에서 말하는 오복은 치아가 좋은 것, 자손이 많은 것, 부부가 함께 해로하는 것, 손님을 충분히 대접할 정도로 넉넉한 살림, 그리고 명당에 묻히는 것입니다. 다른 복의 종류를 살펴보면, 재물이 많은 것, 높은 벼슬을 가지는 것, 인복, 그리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도 복입니다.
이러한 복은 가장 현실적인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현실적인 복만 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자는 진리의 복을 사모했습니다. 그는 아침에 진리의 도에 대해 들을 수 있다면 오늘 저녁 당장 죽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공자가 말하는 복은 깨달음의 복입니다.
본문은 이 세상의 복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깨달음의 복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복은 신령한 복입니다. 신령한 복은 하늘에 속한 복입니다. 하늘에 속한 복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복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속한 복을 전해 주는 통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통로가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13절을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즉 하늘에서 내려왔다가 다시 하늘에 올라간 그리스도만이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신령한 복을 줄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신령한 복을 받는 사람은 정해져 있습니다. 4절을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말씀합니다. 신령한 복을 받는 사람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우리’ 입니다.
4절에서 ‘우리’ 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영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으로 부터 택함 받은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용하는 칭호가 ‘우리’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이방인에 해당합니다.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면서 ‘우리’ 에 대한 개념이 민족적인 개념에서 영적인 개념으로 확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 는 모든 믿는 자를 뜻합니다. 곧 ‘새이스라엘’ 이 우리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라고 하면서 ‘우리’ 에 대한 호칭을 지속적으로 사용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도 ‘우리’ 라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택한 백성을 말씀합니다.
영어에서는 ‘나’ 라는 주어와 ‘우리’ 라는 주어를 분명하게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는 ‘나’ 라는 주어를 사용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우리’ 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그런 것도 잘 먹습니다.’ 라고 말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우리는 그런 것도 잘 먹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 는 은연 중에 나와 연결된 공동체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 공동체가 상황에 따라 가족일 수 있고, 상황에 따라 회사동료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교우들이 ‘우리’ 입니다. ‘우리’ 를 떠난 ‘나’ 를 잘 생각하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우리’ 도 마치 이와 같습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사람들은 은연중에 ‘우리’ 라는 정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를 떠난 ‘나’ 를 잘 생각하지 않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공동체를 뜻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무엇입니까? 곧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마가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의 가족이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부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리가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며 동생들이냐.” 말씀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우리’ 에 해당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가족이 있지만 예수님께서 보실 때 가족은 하나입니다. 곧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 에 관한 말씀을 몇 차례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8절에서 1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선생도 하나요, 아버지도 하나요, 지도자도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가족도 하나입니다.
사람마다 주님을 믿게 되는 과정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방황의 끝에 주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전도지를 우연하게 보고 주님을 믿게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극적인 체험이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환란 속에 주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 교회가 좋아서 오다가 자연스럽게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말에 따르면 자기에게는 예수님DNA가 흐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계기가 어떠하든 예수님이 마음에 끌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끌려서 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모두 창세 전에 택함받은 백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택함 받은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구원받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유일한 이유는 5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 이 내가 구원받은 유일한 이유입니다.
신학자 칼빈은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 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아는 영적비밀이라고 말했습니다. 단지 인간은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교회의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단지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그 신비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신비를 누릴 수 있습니까?
첫째, 5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비로운 사건이 믿음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신분을 가지느냐 하는 것에는 세 가지 경로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의지와는 무관한 경로입니다. 한국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 남자 혹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은 자기 의지와는 무관합니다. 또 하나는 노력을 통해 획득하는 신분도 있습니다. 사장이나 국회의원이 되는 것, 부자가 되는 것 모두 노력을 통해 획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경로는 매우 독특합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 이라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신비를 가지고 있습니다.
6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목적입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은혜의 영광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해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감사합니다.’ 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18절을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천국방언 중에 하나가 ‘감사합니다.’ 입니다. 거저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깊어질 수록 그 사람 입에서 나오는 것은 ‘감사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감사’ 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 아니라, 자기의 영혼에 생명수를 붓게 해 줍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의 영혼이 맑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의 인생이 형통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나라만을 소망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사람에 대한 불평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현재의 삶 속에서 만족할 줄 압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받아들일 때 얻게 되는 둘째 신비는 8절과 9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셔서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십니다. 창세기 18장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비밀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 삼으셨기에 비밀이 없습니다. 그 뜻의 비밀을 알리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받아들임으로 얻게 되는 셋째 신비는 예정입니다. 9절에서 14절 말씀입니다. 예정 자체가 모든 믿는 자의 축복입니다. 예정이라는 것은 우연이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의 삶에 우연이 있다면 불안해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길가다가 사고 당하면 어쩌지? 오늘 우리 가족은 무사히 집에 돌아올까? 시험에 떨어지면 어쩌지? 모두 확신할 수 없는 질문들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불안으로 부터 벗어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발생하는 일은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예정론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정은 운명과 다른 것입니다. 9절에서 14절까지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예정입니다. 그 예정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기업이 되고,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을 이해함에 있어 유일한 열쇠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정론과 숙명론을 비교하면 됩니다.
첫째, 숙명론에는 하나님이 개입되어 있지 않고 예정론에는 하나님이 개입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사주팔자 (四柱八字) 란 말을 씁니다. 자기가 태어난 해, 달, 일, 시각 등을 통해 나는 어떤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식으로 삶을 보는 것이 숙명론입니다. 마치 공장에서 어떤 물건을 기계에서 찍어내듯이 짜여진 틀 속에서 나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숙명론입니다. 그러나 예정론은 하나님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틀 속에 짜여져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정하시고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숙명론은 기계적인 것으로 볼 수 있고, 예정론은 하나님의 수공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숙명론에는 목적이나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정론에는 존재의 목적과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예정론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정론을 이야기할 때는 하나님이 나의 삶을 무엇 때문에 어떤 의미로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에 대한 차원에서 예정론이란 말을 쓰기 때문입니다.
셋째, 숙명론은 기계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율적 응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정론은 인간의 자율적 응답이 있습니다. 신앙적 응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하나님과 말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적 응답, 자율적 응답이 있습니다. 숙명론은 변경할 수 있는 여지가 없이 자기의 삶이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에 대한 목적이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인간이 응답을 보일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정론은 하나님이 내 삶을 이런 목적으로 이런 의미를 두고 이렇게 인도하신다고 보기 때문에 그것에 따른 인간의 자율적 응답이 있고 인간의 반응이 있습니다.
넷째, 숙명론은 내 삶이 정해진 대로 나 혼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정론은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내가 응답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삶을 나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숙명론에는 내 삶에 대한 나의 고백이나 의미부여가 없으므로 완전히 타율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정론에서는 내 삶에 대해 의미를 알고 하나님의 목적에 응답하고 그에 대한 고백을 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자율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마지막으로 숙명론은 인생을 체념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정론은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는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신령한 복은 모두 믿음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복들입니다. 믿음은 하나의 씨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테면 농부는 딸기 씨를 심으면 합당한 기간이 지난 후 딸기가 열린다는 것을 알고, 수박씨를 심으면 합당한 기간이 지난 후 수박이 열린다는 것을 압니다. 즉 농부가 농사를 짓는 이유는 씨의 미래를 알기 때문에 짓는 것입니다. 딸기 씨는 장차 딸기열매를 맺고, 수박씨는 장차 수박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라는 씨도 그 씨의 미래를 알고 심는 것입니다. 그 씨의 미래를 온전히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종착역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정을 입어 하나님의 기업이 되는 것이 믿음이란 씨의 열매입니다.
신령한 복은 오직 택함 받은 백성들만 원하는 복이며 받고 싶어 하는 복입니다. 돈만 추구하는 사람은 돈의 복만 쫓고, 권세만 추구하는 사람은 권세의 복만 쫓고, 스위트홈을 차려서 단란한 가정을 원하는 사람은 그런 소시민적인 복만 쫓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백성은 하늘로 부터 내려오는 신령한 복을 쫓아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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