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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누가복음

누가복음 17장, 하나님나라

by 영구한도성 2022. 8. 17.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20 바리새人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臨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對答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臨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20 ¶ And when he was demanded of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should come, he answered them and said, The kingdom of God cometh not with observation:
21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누가복음 17장, 하나님나라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거룩한 성 예루살렘성의 모습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성은 정금인데, 그 성곽은 벽옥이며, 성곽의 기초석은 12개의 보석으로 꾸며져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성은 해와 달의 비침이 쓸 데 없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거룩한 성 예루살렘 성에서 중요한 것은 정금이나 벽옥이나 12개의 보석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성이 정금과 벽옥과 12개의 보석으로 이루어 있다고 해도, 만일 그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지 않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지 않는다면 그 곳은 천국이 아닙니다. 단지 그 곳은 정금과 벽옥과 보석으로 장식된 건물에 불과합니다.

 

궁전은 임금이 일을 보고 생활하는 건축물을 말합니다. 아무리 화려한 건축물이라고 해도 임금이 없다면 그곳은 궁전이 아니라 유적지에 불과합니다. 궁전이 궁전 되게 하는 것은 화려한 건축양식이나 재료가 아닙니다. 궁전이 궁전 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안에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성이 거룩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 10절을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 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왔으므로 그 성은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는 성이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왔으므로 그 성은 거룩한 성이며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입니다.

 

우리의 삶이 외형적으로 정금과 벽옥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는가를 중요시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외형적 삶의 건물이 정금과 벽옥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해도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결국 무너지는 건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의 건물이 겉으로는 초라한 초가집 같다고 해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영원한 집이 됩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예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우리는 장차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 성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나라는 그 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는 순간부터 하나님나라는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리시는 자리에 앉게 된 순간부터 하나님 나라는 내 안에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는 장차 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는 나라입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내 삶에 임금이 되신다면 나는 모든 것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내 삶이 아무리 불행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영광이 내 삶 가운데 비치고 있다면 가장 축복받은 인생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들었던 무리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그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말씀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온 이들은 이미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온 이들을 축복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못 먹어서 비쩍 말랐고 매끼를 걱정하며 지내야 하는 그들에게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무 가난해서 씻지도 잘 못하고 냄새나는 이들에게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질병으로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연약하고, 무시당하던 사람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는 축복받은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을 살펴보면, 항상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내 심령이 지옥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내 심령이 천국이 되기도 하고, 내 심령이 지옥이 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는 하나님나라만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옥도 가까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 말씀이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죽어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데, 부자는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부자와 거지 나사로 말씀을 보면, 천국과 지옥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부자는 지옥의 불길이 너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시켜서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아주 가까이 있어 지옥에 떨어진 부자가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비유입니다. 비유이지만 천국과 지옥은 동전의 양면처럼, 이처럼 우리 삶에 둘 다 가까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를 지옥에 빠뜨리려 합니다.

 

사단의 올무에 빠지면 이 세상에서 정금과 보석 등을 잃어버릴 때 당황하게 됩니다. 실직을 해도 당황하고, 사업상 부도를 만나면 정신 차리지 못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시한부 인생이라는 판정을 받으면 모든 의욕을 잃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천국 되지 못하고 지옥이 되는 것은 정금과 보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질병으로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천국 되지 못하고 지옥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시편 50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14,15)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우리는 환난 날에도 하나님을 잃어 버려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나를 건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나라는 환난 날에도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 속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부르짖음을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나의 부르짖음 속에 이미 임재 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를 수 있으며 구원의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환난 날에도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과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르게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환난 날에도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제사를 드릴 때 필요한 것은 제물입니다. 솔로몬이 화목제의 희생으로 드린 제물의 양을 보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왕상 8:63) 소가 이만 이천, 양이 십이만 이었습니다.

 

그런데 시편 50편 13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또한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 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은 소와 양이 아닙니다. 이미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물은 감사의 제물 밖에 없습니다. 아벨의 제사와 가인의 제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제물의 종류나 양이 아닙니다. 아벨의 제물에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있었지만, 가인의 제물에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감사의 제사는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감사의 제사는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 그 영혼이 가장 풍요롭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지금 당장 하나님 나라를 경험합니다.

 

범죄 하기 전 아담과 하와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에덴동산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니 부부싸움이 있을 턱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니 걱정, 근심이 있을 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으로 감사가 사라졌을 때 범죄 하게 되었습니다. 범죄 한 후에는 남편이 아내를 원망하고, 아내가 남편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잘못된 것에 대해 하나님의 탓으로 까지 돌렸습니다.

 

바로 이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사라질 때, 우리 영혼은 이처럼 메말라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사라지면 가정도 살벌해지고, 교회도 살벌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있을 때, 가정에도 교회에도 영적인 생동감이 넘치고, 우리 영혼도 생동감이 넘칩니다.

 

사도 바울은 “부한데도 처할 줄 알고 비천한데도 처할 줄 안다” 고 말하였습니다. 비천하면 비천한데로 얼마든지 자족하면서 살 수 있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그런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비천한데 처하더라도 자족할 줄 알 때,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감사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모자라고 넉넉지 못해도 감사한 것이 아니라, 아예 없어도 감사한다고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이것이 하박국 선지자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설사 나에게 재산이 없고, 먹고 살 길이 전혀 없어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참 감사라고 합니다.

 

이런 감사가 있는 사람은 어떤 인생의 폭풍우도 견뎌 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폭풍우 속에서 나를 건지시고 환난 이전 보다 훨씬 큰 축복을 주십니다.

 

시편 50편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이 노래가 어떤 노래입니까? 환난 속에 하나님을 찾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환난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점점 더 연단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찾는 그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자식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힘들고 어렵게 키운 자식이 커서 효도를 합니다.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길러서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아이구 내 새끼야!” 하면서, 귀하게 키운 자식 치고 효도하는 자식이 적습니다.

 

오히려 부모가 잘 해 먹이지도 못하고, 공부도 잘 못시키고, 어릴 때부터 눈물을 흘리면서 힘들게 자란 아이들이 부모에게 효도하려고 합니다. 한푼 두푼 모아서라도 부모의 수고를 덜어드리고 부모의 의복가지라도 사드리려고 애를 쓰는 자식은, 대체로 고생을 이미 경험했던 자식들입니다.

 

하나님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편안하게, 쉽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이 잘 없습니다. 억센 시련과 환난을 통하여 깨어지고 다져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저를 건지리니 저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는 말씀이 바로, 억센 시련과 환난을 통하여 깨어지고 다져진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억센 시련과 환난을 통하여 깨어지고 다져지면서 그는 하나님을 진하게 만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그 누구보다 구체적으로 경험합니다. 환난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환난을 당하여 건짐을 받은 사람들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그래서 환난은 우리에게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환난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더욱 돈돈하게 이어주는 밧줄입니다.

 

부부사랑도 그렇지 않습니까? 참으로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것을 함께 경험을 하고, 이 힘든 시간 속에 서로 사랑하며 함께 한 부부가 진짜 부부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동고동락을 같이 한 경험이 많을수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의 구원자라는 것을 환난을 통해서 보여 주십니다. 환난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이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해 나가고 있는가를 보여주십니다. 환난을 당할 때, 세상사람 모두가 나를 버려도 하나님은 나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물론 환난을 만날 때 즐거워할 사람은 없습니다. 환난은 깊은 아픔과 상처를 남깁니다. 그러나 영적인 신앙의 성장과 발전은 환난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환난으로 인해 비록 아픔과 상처가 있지만, 그 아픔과 상처 속에서 나의 모든 육적인 것이 깨어질 때, 영적인 축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그 아픔과 상처도 모두 아물고 영적인 새 살로 다시 채워집니다.

 

환난을 당할 때 육적인 자아는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자아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을 보면,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나라는 어떤 환난 속에서도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심령가운데 있음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는 잠깐이면 지나가는 고난이나 영화에 매이지 않고, 지금 비록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것을 주목하는 심령 가운데 있음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임재를 갈구하는 심령가운데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심령가운데 있으며, 환난 속에서도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는 심령 가운데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나라는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며, 특정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환경 속에 하나님나라는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삶의 환경을 거부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으로 수용해야겠습니다. 이 안에 하나님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현재의 시간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이 시간을 하나님나라의 시간으로 누리며 살아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간 속에 하나님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