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1장, 만왕의 왕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귀신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적 싸움의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 귀신 들린 한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 수천 마리의 떼 귀신을 돼지 떼에게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돼지 떼는 몰사 당했습니다. 그런데 돼지 떼가 죽은 것이지, 군대 귀신들이 죽은 것은 아닙니다. 군대 귀신들은 돼지 떼를 죽이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마귀 사탄은 본질적으로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돼지 떼를 죽인 군대 귀신은 지금도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군대 귀신은 이미 또 한 명의 사람을 거라사 광인으로 만들었든지, 거라사 광인으로 만들 사람을 찾고 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군대 귀신은 지금 우리 머리 위에서, 우리 생활 주변에서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8절을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은 타락한 천사에 불과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본문에서는 ‘강한 자와 더 강한 자’ 로 표현합니다. 21절에 ‘강한 자’ 는 ‘마귀 사탄’을 말합니다. 22절에 ‘더 강한 자’ 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원래 ‘강한 자’ 인 ‘마귀 사탄’ 의 손에 있다가, ‘더 강한 자’ 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소속이 바뀐 것입니다. 사탄에게 속한 사람은 사탄과 함께 멸망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하나님나라를 상속 받습니다. 어디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운명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사탄에게 속한 자이며, 누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인가를 분명히 말씀 하십니다.
23절을 보면,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반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탄에게 속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벵겔이라는 신학자는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에 중립지대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더라도 착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무리 착하게 산다고 해도,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사탄에게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내 자녀들이 시집, 장가 잘 가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폐 안 끼치고,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을 보고, “아, 저렇게 사는 것도 좋다” 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 임박한 심판을 잊어버려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이것은 멸망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는데,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손을 놓고 있는 것과 갔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사랑하는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있다면, 최우선적으로 우리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착하고 선하게 살도록 하는 도덕적인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사탄에게 결박당한 이들을 풀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사람을 죄와 사망권세로 결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풀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영적 사실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 논쟁을 통해 극명(克明-똑똑하게 밝힘)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하나님나라가 임하게 하십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이 일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20절을 보면,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손’ 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능력’ 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귀신들린 수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심으로 그들에게 하나님나라가 임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24절부터 26절은 그 다음 상황입니다. 24절부터 26절 까지 말씀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그러나 쫓겨난 귀신들은 이것으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갔다가 훨씬 더 많은 숫자의 귀신을 불러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그 다음 사역이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귀신을 쫓아내신 후, 그 사람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십니다. 성령님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나라가 임하게 하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 그를 지켜 주십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일시적으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혜사 성령님이 임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속죄사역을 이루신 후,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사역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을 하신 후, 자기를 시험하는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공생애를 사십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수많은 군중이 환호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탄 왕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마21:5)
그런데 수많은 군중의 환호도 잠깐이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예수님은 고난 받으시는 왕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가시로 만든 관’을 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으신 후, 그 고난의 끝자락인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3일 후, 그를 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심으로,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 되십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승리입니다. 사탄이 가진 죄와 사망권세를 깨뜨리심으로 최후의 승리를 거두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 이라고 부릅니다. ‘만왕의 왕’ 이라는 것은 만인(萬人)을 구원하는 왕이라는 뜻입니다. 압제하고,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만인을 구원하는 왕이 ‘만왕의 왕’입니다. 그리고 만인을 구원하기 위해, 고난 받으신 왕이,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만이 나의 왕이 되시는 것은, 나를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만왕의 왕이 되시는 이유는, 우리들을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속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나’ 만 속죄 받은 것이 아니라, ‘당신’ 도 속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나의 왕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왕이십니다. 우리들의 왕으로 모시고 있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리고 교회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을 믿으며,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날을 소망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결혼식을 앞 둔, 신랑 신부는 설레는 마음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그 날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자, 사랑하는 사람과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에 속하는 교회는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그 새로운 삶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와 누리는 하나님나라에서의 영원복락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백년가약을 맺는 신랑, 신부는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혼인을 하게 된, 우리는 얼마나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영적으로 무디어진 우리들의 마음이 설레는 마음으로 바뀔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에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나라를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벅차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하루하루 삶에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고요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흐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삶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은혜는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평화’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9장 6절을 보면, 예언된 메시야는 ‘평강의 왕’ 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 천사들의 노래가 땅위의 평화를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눅2:14) 그리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소리쳤습니다. (눅19:38)
오늘날에도 이러한 찬송이 내 영혼 가득 울려 퍼진다면, 오늘날에도 이러한 천사들의 노래로 내 심령이 가득 채워진다면,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평화로 가득 찰 수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모든 사탄의 결박으로부터 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나라를 맛보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나라는 그리스도의 평화로 충만한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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