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2장, 구원의 창시자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자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권세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외모가 잘 생기고 아름다운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건강한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천사가 부러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대통령이 되는 것과 천사가 되는 것 두 개의 선택권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천사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삼성 이건희 회장과 같은 재벌이 되는 것과 천사가 되는 것 두 개의 선택권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천사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천사를 선택하는 이유에는 나름대로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천사’ 라는 보통명사가 148번이 나오고, 가브리엘 천사 등 천사의 구체적인 이름이 명명된 것 까지 포함하면 그 이상입니다. 이것을 보면, 성경은 천사의 존재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천사는 아프지도 않습니다. 천사는 늙지도 않습니다. 천사는 염려와 두려움도 없습니다. 천사는 아름답습니다. 타락한 천사가 아니라면 그 천사는 죄도 없습니다. 천사는 이 세상에서 죄로 인한 고통을 당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천사는 부러워할만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람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도피하고 싶을 때 날개달린 천사가 되어 날아가고 싶은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천사를 그렇게 이상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부러워할만한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5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천사가 부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올 때 천사와 사람의 입장이 바뀝니다. 사람이 천사를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가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왜냐하면 장차 올 세상을 천사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장차 올 세상이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천사들의 것이 아닙니다. 택함 받은 백성들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히브리서 1장14절 말씀에 따르면 모든 천사는 섬기는 영입니다. 즉 지배하는 영이 아니라 섬기는 영입니다.
이것이 인간과 천사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인간은 원래 다스리는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인간은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천하만물을 다스리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섬기기만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구원받을 상속자를 섬기는 영이 천사입니다. [히1:14]
창세기 1장28절을 보면,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입니다. 특히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만의 고유권한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생물을 다스리도록 한 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사의 눈으로 볼 때는 천사가 사람을 부러워할 수 도 있습니다. 사람은 다스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더 이상 모든 생물을 다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생물로 부터 공격을 받을 뿐 아니라 천재지변으로 고통 받기도 합니다. 일하지 않으면 땅이 먹을 것을 주지도 않습니다. 질병도 생겼고, 사람은 늙어가게 되고 때가 되면 죽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노예로 살아갑니다. 죄의 노예로 살아가고, 질병의 노예로 살아가고, 돈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시기, 질투, 다툼, 정욕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다스리는 존재가 지배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40장8절을 보면,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 말씀은 상황에 따라 바뀌는 말씀이 아니라 결국은 성취되는 말씀입니다.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 는 창세 때 하신 말씀이 인간의 범죄로 물 건너 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범죄에도 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 하신 말씀은 결국 성취되는 말씀이며 영원히 서게 되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그것을 말합니다. 6절에서 8절을 보면, 인자에게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자라는 호칭은 흔히 예수님에게 사용되는데, 히브리서에서 인자는 보통 인간을 뜻합니다. 즉 인간에게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이 인용하고 있는 말씀은 시편 8편 4절에서 6절까지 말씀입니다. 시편 8편 전체는 인간에 대해서 한 말입니다. 이 시편은 메시야라든가 예수님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80회 이상이 되풀이해서 에스겔을 인자라고 불렀습니다. [겔21:2, 겔30:2] 이와 같이 히브리서 속에 있는 인자라는 것도 사람 이외에 딴 뜻은 없습니다.
본문에서 인용한 시편에는 두 개의 귀절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는가?’ 라는 귀절입니다. 둘째는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라는 귀절입니다. 이 두 귀절은 동일한 것을 두 가지 양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즉 사람이란 존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그토록 그를 생각하고 돌보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사람이란 존재에 대한 감탄사입니다. 천사란 존재에 대한 감탄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사람이란 존재에 대한 감탄을 시편 말씀을 빌어서 하고 있습니다.
감탄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사는 만들어진 존재이지만 사람은 낳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듭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를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녀를 낳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서 부모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피는 물 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적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는 택한 백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낳은 택한 백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사에게는 영광이 없지만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는 택한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이처럼 본문의 시편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영광을 노래한 위대한 산문시입니다. 이것은 천지창조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약속을 확대한 것입니다. 천지창조를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 말씀 하셨습니다. 이제는 이것이 더 확장되어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 때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며 인간은 최상의 복을 누렸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을 다시 이루신 것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는 위치로 인간을 회복시킨 것입니다.
로마서 8장29절을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합니다.
인간과 천사의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택한 받은 백성은 그 아들의 형상이 있는데, 천사에게는 아들의 형상이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맏아들이 되고 우리는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왕권을 누리십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 안에서 왕권을 누리게 됩니다.
천사에게는 왕권이 없는데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는 왕권이 있습니다. 마치 이것과 같습니다. 천사는 섬기는 영이므로 신하들에 속합니다. 그러나 택함 받은 백성은 왕족에 속합니다.
9절을 보면,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헬라문화의 배경 속에서 기록되었습니다. 헬라어로는 본문이 ‘천사들’ 이라고 번역됩니다. 그러나 시편 8편에 해당하는 구약의 원어에서는 ‘천사들’ 이라고 번역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엘로힘보다 조금 못하게 사람을 만드셨다.’ 고 되어 있습니다. 엘로힘은 전능한 하나님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8편은 하나님보다는 조금 못하게 만들어진 인간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해 주신 사람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환경을 언급합니다. 그것은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다스리도록 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현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 죄가 들어옴으로써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초를 당하시고 죽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과 영광은 모두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당초 있어야 할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사람을 좌절과 굴종과 속박과 나약한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을 창조 당시의 목적에 맞게 다시금 만들기 위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알케고스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알케고스라는 것은 영광의 선구자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3장15절에서 예수님을 ‘생명의 주’ 라고 하는데, 여기서 쓰여 진 단어도 알케고스입니다. 사도행전 5장31절에서는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고 하는데 여기서 쓰여진 단어도 알케고스입니다. 히브리서 12장2절의 ‘믿음의 주’ 라는 것도 알케고스입니다.
종합해 보면, 알케고스는 ‘창시자’ 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원이나 기원을 뜻하기도 합니다. 즉 알케고스라는 것은 남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처음으로 길을 열어 주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이 우리들의 구원의 알케고스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들이 뒤따를 수 있도록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친히 비추어 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비추어 주셨는가를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고난을 통해서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과 사람이 일체가 되어야 하는데, 참다운 일체는 고난 받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 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고난 받는 인간의 완전한 구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15절을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의 생각을 살피셨고, 사람들에게 동정을 표시했습니다. 마태복음 9장, 14장, 15장, 18장, 20장에는 “불쌍히 여기셨다” 는 말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두드러진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불쌍히”라는 말은 ‘내장이 몸 안에서 꿈틀거렸다’는 뜻입니다. 애간장이 끊어질 듯이 함께 마음의 고통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으로서 애간장이 끊어지는 것 같은 마음의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스스로가 슬픔이나 괴로움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남의 슬픔이나 외로움을 알 수 없습니다. 신경이 무딘 사람은 신경 쇠약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의 고통을 알 수가 없습니다. 몸이 건강한 사람은 금방 피로해 버리기 쉬운 사람이나 늘 병에 시달리는 사람의 고통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슬픔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비탄에 빠진 사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본 사람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완전한 사람으로서 사람의 입장이 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슬퍼하고 있는지, 어떠한 유혹에 빠져 있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을 도우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스스로 고통을 받으셨기 때문에 괴로움을 받고 있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천사는 인간을 알기는 하지만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공감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되셨던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의 아픔을 직접 겪으셨기 때문에 공감하시고 이해하시고 도우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하실 때 부터 마귀에게 시험당하셨고 그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마귀가 베드로를 통해 시험할 때도 물리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고뇌 속에 있을 때 아버지의 뜻을 수용하기 위해 피 땀을 흘리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형제요 자매인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을 경험하시고 공감하시고 아시기 때문에 능히 우리를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모습이 되 보신 분이시기 때문에 나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의 만남에는 치유가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에는 아름다운 풍경과 음악이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내 입장이 되어본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너무 깊어서 아무리 어둡고 힘들고 눈물이 고인 인생 가운데서도 새싹이 피어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치유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과 수치를 감내하신 분이십니다. 나를 치유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옷을 벗고 인간의 옷을 입으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미지의 길에 처음으로 발자국을 내딛는 사람을 선구자 혹은 창시자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만든 길을 따라 걷게 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단순한 도움이나 문제 해결이 아닙니다. 교회는 단순한 인생문제를 해결해 주는 곳이 아닙니다. 단순한 용기나 삶의 의지를 심어주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큰 구원을 선포하는 곳입니다. 죄인이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원수였던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선포하는 곳입니다.
큰 구원은 노력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닙니다. 큰 구원은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큰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화가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라는 선물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큰 구원이 되지만 무시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공짜를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받는 것이 있으면 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에 관한 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노력을 통해 받아들이고 유지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게 됩니다. 복음은 공짜로 받아 단지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리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주신 하나님에 대해 감사함이 넘치는 사람에게 크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구원의 창시자가 되시는 주님을 따르는 길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구원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또한 주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주님을 위해 고난 받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에도 자화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왕족이라는 자화상입니다. 사람은 살면서 여러 이유로 열등감에 빠지고 의기소침해 하며 나 같은 사람이 살아서 뭐해라는 자기학대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자화상이 분명히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에게서 나올 수 있는 생각이나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원수 마귀가 심어주는 말입니다.
우리는 천사보다 존귀한 존재입니다. 아니 천사와는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한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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