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4장, 큰 대제사장 예수그리스도
히브리서 4장 12절과 13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 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수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의사가 사용하는 수술용 칼을 ‘메스’ 라고 합니다. ‘메스’ 는 그 어떤 칼 보다 예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메스’ 대신 레이저 광선으로 수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레이저 광선도 혼과 영을 갈라낼 수 없고,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해부할 수 없습니다. 레이저 광선 보다 더 예리한 것이 개발 된다고 해도 혼과 영을 갈라낼 수는 없고,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은 해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 영을 갈라낼 수 있고,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도 해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혼과 영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너무나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13절 하반절에서 선포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난다.’ 는 사실입니다. 결산을 받는 때는 심판대에 서는 때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영벌에 처해 질 자들이나, 영생에 들어갈 의인들이나 일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14절을 보면, ‘그러므로’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므로’ 라는 말씀입니다. ‘장차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두려운 일이 발생하므로’ 라는 말씀합니다.
그렇게 두려운 일이 발생하지만, 우리에게 누가 있다고 말씀합니까?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신다.’ 말씀합니다. 큰 대제사장이 계시기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산의 날이 오지만, 모든 것이 드러나는 날이 오지만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약시대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1년에 1차례 대속죄일(유대력 7월10일)에만 지극히 존귀하신 하나님의 성소(지성소)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레23:26-32) 그래서 구약의 대제사장이 드린 속죄제사는 한시적이며 반복적이었습니다. (1년에 한번씩)
그러나 신약에 이르러 큰 대제사장이 되시는 그리스도는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스스로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한시적이고 반복적인 제사를 없애시고 한 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한시적이며 반복적인 구약의 제사와 한 번에 드리신 영원한 제사는 그 뿌리가 다릅니다. 구약의 제사는 그 뿌리가 율법이며, 그리스도의 제사는 그 뿌리가 은혜입니다. 율법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는 것이 그 중심이고, 은혜는 죄의 용서가 그 중심입니다.
구약의 제사에서 짐승을 죽이는 것은 죄가를 치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는 모든 죄가를 다 치루었기에 용서가 그 중심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 때는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지성소에 들어갈 때 두려움 속에 들어갔습니다. 혹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때 두려움 속에 나아가지 않습니다. 담대함으로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가를 그리스도께서 다 치루셨기에 용서를 믿고 나아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드러나는 두려운 날이 오지만 한 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큰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계시기에 그 날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변호자가 되시고, 구속의 주님으로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날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변호자가 되시고 구속의 주님으로서 증인이 되십니다.
15절을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말씀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언제 드러납니까? 살아가고 있는 지금 드러납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남기고 있는 것은 죄와 허물 밖에 없습니다. 이것만 생각하면 우리는 매일 매일 낙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 매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큰 대제사장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마저도 십자가상에서 감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연약한 가운데 있는 우리를 동정하는 분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분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인간의 형상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배고픔을 겪으셨고, 40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피곤함과 갈증을 느끼셨고, 인간의 슬픔과 애통함을 맛보셨습니다.
마지막 순간에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모든 인생사의 비극까지도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에 대해서 잘 아십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인간의 슬픔을 아시고, 인간의 고통을 아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비극을 잘 아십니다. 잘 아시기에 연약한 우리를 동정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동정하시고 도우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지만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문제를 죄인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가 없으시기에 우리를 동정하시면서 도우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알콜중독자도 주님을 만나면 그 중독에서 벗어납니다. 어떤 습관적인 죄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주님을 만나면 그 죄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오면서 아무리 큰 인생사의 비극을 겪는다 해도 주님이 계시는 한 그 비극이 희극으로 마무리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친히 인생사의 모든 비극을 십자가상에서 다 감당하셨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권능을 행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믿는 도리를 굳게 잡는 것입니다. ‘믿는 도리’ 라는 것은 큰 대제사장은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 이면서 ‘예수’ 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큰 대제사장의 신성을 말합니다. ‘예수’ 라는 이름은 큰 대제사장의 인성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라는 이름 속에서 죽음을 포함한 인간사의 모든 비극을 감당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이름을 속에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주님을 만납니다.
믿는 도리를 굳게 잡는 사람에게 주님은 인생의 모든 비극을 감당하신 주님이시자, 하나님나라로 인도하시는 주님이 되십니다.
그 하나님 나라를 히브리서 4장 1절에서는 ‘안식에 들어갈 약속’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안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마11:28) 하나님나라는 이 세상의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벗어버리고 쉬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 있어 저 세상은 두려운 나라가 아닙니다. 영원하고 완전한 안식이 있는 나라입니다. 가고 싶은 나라입니다.
16절은 그 나라에 갈 때 까지 성도들의 신앙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긍휼하심은 죄에 대한 용서입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는 그 때 그 때 필요한 성령의 각종 은사와 능력입니다.
우리는 매일 주님의 긍휼과 때를 따라 돕는 주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매일 주님의 긍휼과 그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의 긍휼과 은혜는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라는 것은 시험에 빠졌을 때 건져내 주시도록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시험에 빠지지 않았지만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일 주님의 긍휼과 때를 따라 돕는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별로 기도할 것이 없다’ 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말은 별 특별한 상황도 없고, 그런 저런 잘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상황이 없고, 그런 저런 잘 살아가고 있어도 우리는 매일 주님의 긍휼과 때를 따라 돕는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시간은 아무리 길게 한다고 해도 그것이 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요구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의 위기의 때일 수 있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달리 쓰시고자 하시는 전환기의 시점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환경이 조성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때를 대비하여 미리 기도의 탑을 쌓아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역경을 만나서 시험을 당하기도 하고, 반대로 모든 것이 잘 되어서 시험을 당하기도 합니다. 특히 죽음의 순간은 가장 큰 시련의 시기입니다. 이러한 때를 대비해서 우리는 미리 기도해야 합니다.
역경을 만나더라도 그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고,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는 이 시간에 영적으로 해이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 삶을 다 살고 난 뒤 죽음의 순간이 불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 속에 그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미리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기도와 간구를 드릴 때, 이러한 모든 기도와 간구를 위해 은혜의 보좌 나아갈 때 담대해야 합니다. 겸손하면서도 담대해야 합니다.
‘담대하게’ 라는 것은 예속 당하지 않는 자유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환영하기 때문에 당신은 두려워하지 말고 자유롭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한없는 신뢰와 사랑으로 자유롭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거룩한 담력과 깊은 친교는 바른 기도의 정신이다. 나는 기도할 때 무한하신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가장 친한 친구에게 말하는 것 같은 친밀함을 가지고 기도하였다.’ 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고 담대하게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자녀로서 그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공포나 놀람이 아니라 존경과 경외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또 우리는 재판석 앞에 끌려가는 것 같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긍휼의 자리에 초대 받아 가는 사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은혜의 보좌는 사랑이 넘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제사장이시기에 우리는 그를 의지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가 없었다면 우리는 감히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되고 더럽혀진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다 더럽혀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독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중보자이신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를 통해 지성소로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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