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은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는 이렇게 자기소개를 합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 이라고 자기소개를 합니다.
이것은 바울의 사도성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정체성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아버지로서의 정체성이 있는 사람이 아버지다운 삶을 살고,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이 있는 사람이 어머니다운 삶을 삽니다. 교사로서의 정체성이 있는 사람이 교사답고, 학생으로서의 정체성이 있는 사람이 학생답습니다.
병리적인 정체성도 있습니다.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이나 심각한 사회적 범죄가 발생하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어느 듯 범죄자의 정체성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정체성이 형성되면 죄에 대해 거의 무감각해 집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존재가 사람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된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탄생한 존재이기에 하나님께 대하여 예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속한 정체성이 있기에 하나님께 속한 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은 하늘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탄생했기에 과거의 것을 붙들고 살지 않습니다. 지나간 것을 붙들지 않습니다. 과거의 것, 지나간 것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대부분 사람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그것이 원망이나 분노이든, 그것이 미련이나 후회이든, 그것이 행복에 대한 기억이든 모두 사람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과거의 것이고, 다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에 대해 밝히면서 선포하고 있는 것, 곧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 는 것은 지금의 바울은 과거의 사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과 관련된 과거의 사울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바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힘들게 신앙생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도 사람과 관련된 것들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 것은 사람과 관련된 것들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혼란스러운 것은 사람과 관련된 것들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이 진정으로 행복하고, 교회가 진정으로 평화롭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인 자 가운에서 살리신 하나님으로 인해 탄생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붙들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이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것, 하나님께 속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에 대한 것이며, 부활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것이며, 하나님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에 대한 것이며,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매일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붙드는 사람에게 죄사함과 용서가 있고, 부활을 붙드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으며, 하나님나라를 붙드는 사람에게 산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붙들며 믿음을 붙드는 사람은 오늘 영적으로 살아가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과 관련된 문제를 가지고 살아가기 쉽습니다. 오늘 하루 중 내 마음을 힘들게 하고, 고민하게 만들고 있는 일이 있다면 거의 대부분 사람과 관련된 일입니다.
사람과 관련된 문제는 아무리 고민하고 분석해 봐야 항상 그 자리입니다. 설사 오늘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 해도 내일 되면 사람과 관련된 문제가 또 발생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에 지치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분석하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대신 십자가에 대한 것, 부활에 대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구원에 대한 것,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것, 믿음에 대한 것을 생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독수리는 날개 짓 대신에 공기의 흐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공기의 흐름에 자기 몸을 반응시키는 것입니다. 이 방법을 통해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삶은 무엇입니까?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공기와 같은 것입니다. 내 영혼을 반응시키는 공기와 같은 것이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내게 주어진 삶에 반응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수많은 사건들이 그리스도인에게는 공기와 같은 것입니다. 독수리가 하늘을 날 때 공기를 이용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그러한 삶의 사건을 이용해 하늘을 오르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몸서리칠 정도로 미운 원수 같은 사람이 왜 등장했을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상의 용서를 배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용서는 어떤 용서입니까? 사람이 이해할 수도 없고, 행할 수도 없는 용서입니다. 이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이고, 하늘에 속한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사건 속에서 하늘에 속한 용서를 배우며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월이 지나면서 병이 들고 주름살이 더 생기고 기력이 떨어집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세상의 소망이 더 끊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흘러가는 세월을 통해서도 하늘로 올라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육체는 내리막길을 걷지만 내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서 늘 돈 걱정을 하면서 살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으로 만들어 하늘나라를 보게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은 하나님나라로 더욱 힘차게 날아오르게 하는 공기와 같은 것입니다. 이사야 40장31절을 보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삶의 시련과 고난은 하늘로 더욱 오르게 하는 공기와 같은 것입니다. 앙망(仰望)이라는 것은 우러러 바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타락한 본성상 아무 일이 없고, 인생의 굴곡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앙망하기 힘듭니다. 시련이 있고, 고난이 있고, 인생의 굴곡이 있기에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정체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비슷한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나 앙망하면서 살아왔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것이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것은 늘 하나님 안에서 내 존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것은 삶의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끊임없이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소개한 사도성 속에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기에,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인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말미암았기에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새롭게 된 바울은 두 가지 기도제목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3절에서 5절까지 말씀입니다.
첫째 기도제목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기대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해야 합니다.
먼저 나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위해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은 늘 주님의 은혜와 평강으로 넘쳐나야 합니다.
누가복음 18장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 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와 평강으로 넘쳐나기를 기대한다면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은 극히 사소한 일로 짜증을 냅니다. 조금 전까지 기분이 좋았다가 어떤 소리를 들으면 당장에라도 기분이 나빠질 수 있습니다. 이때는 주님의 은혜와 평강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낙망하기 쉬운 환경입니다.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안이 깨어지고 위기가 찾아오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은혜와 평강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은 내 삶의 환경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은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발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할 때 간구의 기도도 드려야 하지만,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기도도 드려야 합니다. 내 중심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경험할 때, 지금까지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 중심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교류가 발생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인격적인 교류가 발생하면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것들이 인간의 ‘사고의 대상’ 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 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고찰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 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과 같습니다. 나와 인격적인 관계성이 없는 사람은 내게 ‘사랑의 대상’ 이 아니라 ‘사고의 대상’입니다. 사람이 내게 ‘사고의 대상’ 이 되면, 그 사람의 표면적인 부분만 보고, 나와의 관계성에서는 실리만 따지게 됩니다. 그 사람이 내게 ‘사고의 대상’ 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내게는 빈 껍데기에 불과하며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내게 ‘사랑의 대상’ 이 되면 그 사람의 본질을 보고자 합니다. 빈 껍데기가 아니며 그는 내게 중요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는 내게 ‘사고의 대상’ 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랑의 대상’ 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내게 ‘사랑의 대상’ 이 될 때, 하나님나라와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들이 ‘사랑의 대상’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하는 영의 차원을 넘어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만드는 영이십니다.
바울의 두 번째 기도제목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라는 것이 두 번째 기도제목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두 번째 기도제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이유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다는 데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 함은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특히 한창 살아갈 젊은 나이에 가족을 잃게 되면 그 슬픔이 더 큽니다. 아직 자녀들이 더 성장해야 하는데, 가장이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아픔이 더 큽니다. 우리는 그 때 잃은 가족만 생각이 나고 다른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옆에 누가 있어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전에 주님께서는 나와 내 가족을 위해 먼저 자기 몸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나와 내 가족을 위해 먼저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왜 사랑하는 이를 먼저 데려 가셨습니까?” 라고 주님께 묻는다면, 주님께서는 “내가 너를 위해 먼저 죽었었다.” 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를 선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사무엘상 2장6절을 보면,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말씀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우리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손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고 사는 것에 대해서 초연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육체가 죽고 사는 것에 매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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