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성경/로마서

로마서 5장, 확증된 사랑

by 영구한도성 2022. 8. 3.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1 Therefore being justified by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2 By whom also we have access by faith into this grace wherein we stand, and rejoice in hope of the glory of God.
3 And not only so, but we glory in tribulations also: knowing that tribulation worketh patience;
4 And patience, experience; and experience, hope:
5 And hope maketh not ashamed; because the love of God is shed abroad in our hearts by the Holy Ghost which is given unto us.
6 For when we were yet without strength, in due time Christ died for the ungodly.
7 For scarcely for a righteous man will one die: yet peradventure for a good man some would even dare to die.
8 But God commendeth his love toward us, in that, while we were yet sinners, Christ died for us.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義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主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和平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恩惠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榮光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患難 中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患難은 忍耐를,
4 忍耐는 鍊鍛을, 鍊鍛은 所望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所望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聖靈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軟弱할 때에 期約대로 그리스도께서 敬虔하지 않은 者를 爲하여 죽으셨도다
7 義人을 爲하여 죽는 者가 쉽지 않고 善人을 爲하여 勇敢히 죽는 者가 或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罪人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爲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對한 自己의 사랑을 確證하셨느니라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말씀합니다.

 

여기서 ‘그러므로’ 라는 것은 4장 25절 말씀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얘기하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과 화평이 없습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화평하지 않으면 가정이 지옥이 됩니다. 회사에서 동료들과 화평하지 않으면 회사에 다니기 싫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화평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그냥 불편한 관계로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평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화평’ 은 헬라어로 ‘에이레네’ 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 외적으로도 형통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 화평하는 것이 가장 실존적인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과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늘 자기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께 기도함에 있어 막힘이 없어야 합니다.

 

내가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겪는 역경도 하나님을 배반하는 빌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역경 속에 오직 화평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아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아침에 직장에 출근하면 때가 되어 저녁에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학교에 등교했다가 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옵니다. 어떤 볼 일이 있어 집을 나갔다가도 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에서 쉼을 얻고, 집에서 마음의 정리를 하기도 하고, 집에서 내일 일을 다시 준비합니다. 밖에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집에서는 그 힘든 일이 해소되고 에너지가 다시 충전되어야 합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힘든 일이 있다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힘을 얻어야 합니다. 어떠한 분노로 자기 몸과 영혼을 상하게 하고 있다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서 치료받아야 합니다. 무언가 계획하고 준비할 일이 있다면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께 묻고 그 일을 계획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무언가 토설하고 싶고, 무언가 하소연하고 싶은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그것을 삭이며 참고 있으면 안 됩니다.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서 하나님께 토설하고 하나님께 하소연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항상 하나님아버지 집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삶입니다.

 

2절을 보면,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 라는 것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이 은혜’입니다. 이제 화평을 누리는데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주기도문의 두 번째 문장과 세 번째 문장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입니다. 주기도문의 이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기도입니다. 자기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영광입니다. 자기영광의 기준은 바로 자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영광의 기준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때, 삶에 대한 해석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삶의 기준이 자기가 되면, 역경을 당할 때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삶의 기준이 하나님이 되면, 역경이 하나님의 연단이 되고 정금 같은 믿음으로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됩니다. 삶의 기준이 자기가 되면, 인생에 대한 목표가 소시민적인 자기 꿈이거나 자기야망이 됩니다. 그러나 삶의 기준이 하나님이 되면, 인생에 대한 목표가 하나님 영광이 됩니다. 직업을 선택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이고, 직장생활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힘들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의무감으로, 마지못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즐거운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즐겁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숙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이 즐거워집니다.

 

처음 악기를 배울 때는 힘이 듭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수준에 달할 때 까지는 억지로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게 되고, 그 악기 연주의 맛을 제대로 알 때가 되면 그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그 악기와 자기가 한 몸이 되고 한 마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는 것도 이제 하나님의 영광과 한 몸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과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면 기도하는 것이 힘들 수 있습니다. 특히 기도 속에 자기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면 기도가 쉬울 수 있습니다. 쉽다는 것은 막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역경이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역경을 즐길 수 있습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고, 하나님께서 이 역경을 통해 영광 받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절과 4절을 보면,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지만,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고 말씀합니다.

 

환난을 감당하는 세 가지 자세가 있다면, 하나는 그 환난이 싫어서 도피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얼굴에 인상을 쓰며 억지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즐거워하며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환난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겪는 고통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상황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환난을 보편적인 환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만이 겪는 아주 독특한 환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자기 기준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내가 겪는 환난이 가장 큰 것도 아니고, 내가 겪는 환난이 나만이 겪는 독특한 것도 아닙니다. 내가 겪는 환난은 다른 사람도 겪고 있는 아주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의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13절을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말씀합니다.

 

우리에게는 감당하지 못할 시험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할 때 궁지로 내 몰린 생쥐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극심한 환난 속에 있는데, 동서남북 다 막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동서남북 다 막혀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드릴로 구멍을 뚫어서라도 피할 길을 내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환난을 즐거워함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는 것은 소망에 단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소망이라는 것은 환난이라는 첫 째 계단, 그리고 인내라는 두 번째 계단, 그리고 연단이라는 세 번째 계단을 밟은 후, 밟게 되는 계단입니다.

 

만일 이러한 계단을 순차적으로 밟지 않는다면, 소망이 견고하지 않고 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CEO가 된 사람은 내실이 있는 CEO입니다. 그러나 재벌 2세 라는 이유만으로 낙하산 인사로 CEO가 된 사람은 내실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견고한 소망을 가지게 하기 위해 환난과 인내와 연단이라는 계단을 허용하십니다.

 

5절에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한다.’ 는 것은 그 소망이 참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거짓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우리나라의 정치권력이 마지막에 어디로 많이 갑니까? 법의 심판을 받아 교도소로 많이 갑니다. 거짓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재산이 항상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까? 오히려 그 재산으로 인해 부부간에, 또는 자식간에, 심지어 친인척 간에 재산 싸움이 생깁니다. 거짓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너무 의지하고 믿는 것도 거짓 소망입니다. 얼마든지 사람은 사람을 배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믿는 자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소망은 결코 물거품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필연코 실현되는 소망이며, 영원한 소망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5절 하반절을 보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말씀합니다.

 

그 소망이 참 소망이라는 사실을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 사랑 때문에 알게 됩니다. 즉 참 소망과 하나님 사랑은 긴밀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결혼하여 신부와 신혼여행을 갔는데, 신혼여행을 간 그 4박 5일의 시간이 그렇게 평화로웠다고 합니다. 이 신혼여행이 끝나면 삶이라는 현실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혼여행 시간만큼은 아무런 걱정, 근심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이 여자와 함께라면 세상이 무섭지 않고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 여자를 사랑하는 만큼 희망도 컸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라는 말씀은 마치 신혼여행을 간 부부의 이야기와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나라의 참 소망은 하나님 사랑과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나에게 하나님나라의 참 소망이 있다 함은 하나님 사랑을 안다는 의미이고, 하나님 사랑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참 소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성이 뜨거운 사람일수록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불타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그 하나님 사랑을 어떻게 기록합니까? 6절에서 8절 까지 다 함께 한 목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사랑을 믿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본문을 보면,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말씀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죽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의인이거나 선인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죽음을 가치 있는 죽음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진 임금을 위하여 충성스러운 신하가 죽는다거나 테레사 수녀처럼 인류를 위해 희생하는 선인을 위해 함께 희생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나의 됨됨이나 상황이 아닙니다. 더구나 나는 의인도 아니고 선인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인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죄인인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시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죄인입니까? 태어나서 범죄함으로써 죄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이나 그리스도 이후의 사람이나 동일합니다.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도 모두 죄인으로 태어나고, 그리스도 이후의 사람도 모두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그리스도 이후의 사람 뿐 아니라 이전의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8절 하반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합니다. ‘확증하셨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쉬니스테신’ 이라고 하는데, 현재형입니다. 이것은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 처음이자 나중이신 하나님께서 과거나 지금이나 미래에도 당신의 그 사랑을 확인시켜 주심을 가리킵니다.

 

또한 ‘쉬니스테신’ 곧 확증된 사랑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변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변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변해서 하나님 사랑을 의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은 일정한 빛과 같습니다. 결코 상황에 따라 요동치지 않습니다. 나의 모습이 어떠하냐에 따라 하나님 사랑이 변하지 않습니다. 확증된 사랑이라는 것은 이처럼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첫 사람 아담에게 속한 모든 죄인들의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습니다. 아직 연약할 때에,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어떠하십니까? 여전히 연약하여 범죄하지만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십니다.

 

주님께서 나의 주님이 되시는 이유는 내가 믿음이 좋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주의 일을 위해 열심을 내기 때문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의 주님이 되시는 이유는 내가 아직 연약할 때에, 내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나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주님께 나아갈 때, 나의 행위나 공로를 가지고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께 나아갈 때, 나의 연약함, 나의 죄인됨을 시인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집 떠난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가진 것도 없었습니다. 탕자는 자신이 아들이 아니라 종 취급을 받아도 좋다고 생각하며 아버지의 집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비록 탕자이지만 아버지의 집을 너무 그리워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받아 주십니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께 나아갈 때는 나의 모습이 어떠하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고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고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사람일수록 어떠한 삶을 살게 됩니까? 이전의 탕자의 삶을 버리게 됩니다. 한 때는 허랑방탕한 삶이 좋았지만, 이제는 그 삶은 생각도 하기 싫어집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확증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반응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소리가 납니다.

 

그 사랑에 반응한다는 것은 ‘주님! 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사랑고백을 할 때, 주님께서 나에게 행하신 그 사랑도 더 깊어집니다.

 

‘여자는 사랑을 먹고 산다.’ 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사랑을 먹고 사는 주님의 신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신부로서 ‘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세월이 지날수록 하나님과의 화평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