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장, 바디매오
미국에서 큰 한인교회를 이끌고 있는 한 목회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분은 '보청기 목회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분은 귀가 잘 안 들려 보청기를 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부정적인 말을 할 때나 불신의 말을 할 때나, 상대방의 말을 들어서 이롭지 못하다는 판단이 들 때, 그리고 상대방이 극한 감정을 표출하며 큰 소리로 말할 때는, 슬그머니 보청기를 귀에서 빼버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 소리도 안 듣는 가운데 기도에 몰두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런 소리를 안 듣는 가운데 기도에만 몰두하게 되면,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 듣지 못한다는 약점을 오히려 목회를 함에 있어 강점으로 살린 예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헬렌켈러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치명적인 약점이 오히려 그녀를 유명한 작가요 사회사업가로 만들었습니다.
본문의 맹인 바디매오는 어떻습니까? 보지 못한다는 약점이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 지르게 만들었고, 보지 못한다는 약점이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향하여 더욱 크게 소리 지르게 만들었습니다.
약점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신체 조건이 약점일 수 있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환경이 여러 면에서 열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향하여 크게 소리 지를 수 있다면 과연 그것이 약점일 수 있겠습니까?
바디매오는 맹인이기 때문에 앞에 예수님이 지나가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지르기 시작합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바로 코앞에서 지나가고 계시는지, 100m전인지, 200m전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소리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48절을 보면,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말하였지만, 그는 더욱 크게 소리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 고 소리 지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소리 지르는 일 뿐이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 고 소리 지르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디매오의 믿음이었습니다.
신앙경륜이 오래 쌓이면 오히려 믿음을 복잡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 대해서 많은 설명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은 단순한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에게 있어 믿음은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 고 소리 지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 고 외치는 믿음 하나로 고침 받게 되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 고 외치는 믿음 하나로 실제적으로 믿음의 체험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체험은 바디매오처럼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 고 외치는 그 믿음 하나로 충분한 것입니다.
나에게 한 맺힌 기도제목이 있다면,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 고 소리 지릅시다. 나의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 ‘이 아들을, 이 딸을 불쌍히 여겨 달라.’ 고 소리 지릅시다. 그리고 교회의 한 맺힌 기도제목에 대해, ‘이 교회를 불쌍히 여겨 달라.’ 고 소리 지릅시다. 그리고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할 때,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 달라.’ 고 소리 지릅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합시다.
여기에 나타난 바디매오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첫째로,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 외치는 믿음입니다.
‘다윗의 자손’ 이라는 것은 메시야에 대한 호칭입니다. 이 호칭 속에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바디매오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창조주 하나님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기도를 들으시는 이가 누구신가를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기도를 듣고 있는 이는 내 잠재의식 속에 있는 추상적인 누군가가 아닙니다. 내 기도를 들으시는 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말씀 속에 글자로 숨어 있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2,000년 전에 육체로 오셨다가 사라지신 하나님도 아니십니다. 지금 살아계셔서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의 자리에 앉을 때 마다 기도를 들으시는 이가 누구신가를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이가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믿음은 기도를 들으시는 이가 누구신가를 명확히 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세상종교나 우리나라 무속신앙은 대상이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수능고사가 있을 때, 우리나라 어머니 중, 어떤 어머니는 냉수 한 그릇 떠 놓고, 시험이 끝날 때 까지 빌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비는 지를 본인도 모릅니다. 냉수가 들어준다고 생각하는지, 조상신이 들어준다고 생각하는지 분명한 기준이 없습니다.
팔공산 갓바위도 마찬가지입니다. 돌로 만들어진 석상이 기도를 들어주는 건지, 부처가 기도를 들어주는 건지, 그 앞에서 빌고 있는 사람도 명확한 기준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 기도를 들으시는 이는 그 누구도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시작할 때,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나를 어머니 모태에서 지으시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묵상이 필요합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의 기도를 하면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이가 누구신가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이가 누구신가를 알 때,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바디매오는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 고 외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 중에, 나병환자 한 사람은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는 간구를 했습니다. (마태복음8장) 백부장은 자기 하인을 위해서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고 간구합니다. 한 관리는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고 간구합니다. (마태복음9장) 이처럼 주님께 간구했던 사람들은 그 간구의 내용을 보면 구체적인 병명이나 그 사람의 상태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나병환자는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고 말함으로써 자기 병이 부정한 병, 나병임을 간접적으로 말했습니다. 백부장은 자기 하인의 병이 중풍병이라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한 관리는 자기 딸이 지금 죽었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저는 앞을 보지 못합니다.’ 는 말을 먼저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한 말은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 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 는 바디매오의 기도에서 ‘예수의 기도’ 라는 유명한 영성기도의 전통이 형성 되었습니다. 중세의 수도사들은 예수의 기도라는 것을 드렸는데, 그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 말을 반복해서 말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핵심은 예수님 이름 자체에 능력이 있다는 신앙심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수도사들은 예수님 자체를 자신의 삶의 중심에 두기 위해 예수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요.” 를 반복하면서 예수님이 자기 삶의 중심이 되도록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짤막한 기도문 자체가 자신을 인도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보게 되면서, 예수님 이름 자체에 권세가 있다는 것이 삶 속에서 증명되기 시작했습니다.
말의 힘은 기도하는 사람의 내면에 새로운 인간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기도문 역시 우리가 반복해서 기도하게 되면, 그 기도문에 나타난 주님의 뜻과 주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말은 사람을 부정적으로 만들고, 긍정적인 말은 사람을 긍정적으로 만들 듯이, 예수님 이름을 반복적으로 부르면, 예수님 이름 권세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반복적 기도 방식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중언부언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중언부언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는 잘못된 기도 습관입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는 기도 방식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기 위한 영적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돋보기로 신문을 태우는 놀이를 가끔씩 하였습니다. 돋보기로 태양의 초점을 맞추면 태양열이 그 초점으로 집중되기 때문에 신문에 구멍을 낼 수가 있습니다. 태양의 초점을 맞추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고, 초점을 맞추면, 맞추어진 초점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손에 흔들림이 없도록 집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치 주님만 바라보며 기도한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기도할 때, 내 마음 다르고, 주님 마음 다를 수가 있습니다. 누구 마음에 맞추어야 합니까? 내 마음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님 마음에 맞추어야 합니다. 초점을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일단 주님께 초점이 맞추어지면, 흔들림이 없도록 집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주님께 맞추어진 기도를 하게 되면, 그 기도는 화약이 터지도록 불을 붙이는 심지가 될 수 있습니다. (도화선導火線)
사단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지식을 쌓도록 충동질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속한 유혹과 탐욕에 빠지게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집중력을 흩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 돋보기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속한 유혹에 탐욕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께 돋보기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끊임없는 허무와 곤고함만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때는 영원한 생명과 안식이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기도가 하나님께 돋보기의 초점을 계속 맞추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는 때로 허공을 치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분노 속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 가운데 기도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만족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고 난 뒤에도 찜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 내용을 하나님의 뜻에 끊임없이 맞추고자 한다면, 나중에는 확신에 찬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 는 내용은 그 내용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기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함에 있어서도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를 알지 못해 기도를 망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에 대해 “불쌍히 여겨 달라.” 고 기도하는 것은, 100%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당신의 양 떼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당신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불쌍히”라는 말은 ‘내장이 몸 안에서 꿈틀거렸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애간장이 끊어질 듯이 마음의 고통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몸속의 창자가 끊어질 듯이 아픔을 느끼며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셨고, 지금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마음을 알고,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 고 소리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외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 지르자,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고 충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더욱 크게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 지릅니다. 바디매오는 조용히 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의기소침해서 조용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더욱 큰 소리로 소리쳤습니다.
만일 꾸짖으며 잠잠하라는 무리들의 말에 바디매오가 영향을 받아 잠잠히 있었다면 그의 마음은 다시 어둠의 나락(奈落-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래, 이건 주제 넘는 짓이야, 여기 사람들도 많은데, 나 같은 사람에게 누가 관심을 가지겠어. 사람은 그냥 생긴 대로 살아야 해. 늘 이렇게 거지처럼 살아왔는데, 변할게 뭐가 있겠어?” 바디매오에게는 이런 수많은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을지 모릅니다.
신앙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너무 의식하는 것입니다. 환경을 너무 의식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에게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첫째는 “잠잠히 하라” 고 훈계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앞을 볼 수 없는 상황’ 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장애물을 의식하게 되면,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향해 소리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장애물이 놓여 있어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예수님을 향해 소리쳐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처한 어두운 환경에 너무 빠져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을 향해 소리칠 때에,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우리자신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 자신의 미움, 자신의 염려, 자신의 이기심과 편견, 자신의 상처 등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결코 아름답지 못한 광경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드릴 때, 이러한 과정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려움, 미움, 염려, 편견, 과거와 현재의 이런 저런 상처가 보이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께 외쳐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름 권세가 이러한 모든 어둠의 세력을 물러가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말로 더욱 크게 소리 지르는 바디매오를 보시고, 그 자리에 머물러서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를 부르라.’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바디매오에게,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말해 줍니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묻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 때 비로소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합니다.” 고 말합니다.
바디매오는 끊임없이 주님께 소리를 지른 결과, “네 소원이 무엇이냐?” 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이 질문이 어떤 질문입니까? 아직 그는 눈을 뜨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는 주님의 질문은 이미 그에게는 그 영혼을 따뜻하게 충분히 감싸는 위로와 평안의 음성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까지 끊임없이 주님께 외치는 것은 도전적인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디매오의 기도를 생각하면서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바디매오의 믿음을 생각하면서 나의 믿음에 대해서 낙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바디매오처럼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합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의 세계로 빠져듭시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보다 더 새로운 차원의 기도의 세계에 문을 두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보다 더 새로운 차원의 믿음의 세계에 문을 두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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