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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마가복음

마가복음 11장, 예루살렘 입성

by 영구한도성 2022. 8. 8.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 And when they came nigh to Jerusalem, unto Bethphage and Bethany, at the mount of Olives, he sendeth forth two of his disciples,
2 And saith unto them, Go your way into the village over against you: and as soon as ye be entered into it, ye shall find a colt tied, whereon never man sat; loose him, and bring him.
3 And if any man say unto you, Why do ye this? say ye that the Lord hath need of him; and straightway he will send him hither.
4 And they went their way, and found the colt tied by the door without in a place where two ways met; and they loose him.
5 And certain of them that stood there said unto them, What do ye, loosing the colt?
6 And they said unto them even as Jesus had commanded: and they let them go.
7 And they brought the colt to Jesus, and cast their garments on him; and he sat upon him.
8 And many spread their garments in the way: and others cut down branches off the trees, and strawed them in the way.
9 And they that went before, and they that followed, cried, saying, Hosanna; Blessed is he that cometh in the name of the Lord:
10 Blessed be the kingdom of our father David, that cometh in the name of the Lord: Hosanna in the highest.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橄欖 山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弟子 中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便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萬一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主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卽時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弟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門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中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弟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許諾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自己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自己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者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讚頌하리로다 主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讚頌하리로다 오는 우리 祖上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가복음 11장, 예루살렘 입성

 

 

 

마가복음에는 ‘곧’ 혹은 ‘즉시’ 라는 말이 총, 칠십 이 회(72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활동을 신속하게 전개시키며, 빠른 속도로 십자가로 몰아가기 위해 ‘마가’ 가 사용한 특수 어투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고난 받고,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분위기는 어떠합니까? 환호와 환영과 흥분의 도가니입니다.

 

본문에서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흔히 ‘승리의 입성’ 이라고 부릅니다.

 

이때는 유대 민족의 최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등) 가운데서도 가장 큰 절기라 할 수 있는 유월절을 약 1주일 앞 둔 때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군중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고,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수많은 군중의 환영과 호위를 받고, 예루살렘 성내로 들어가셨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베다니에서부터 예수님의 행렬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는 예루살렘 성내에서 나온 무리들과 합세하여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왕을 환영하듯이, 흥분된 마음으로 환영하였습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와서,(레23:40)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지극한 존경과 큰 기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께 지극한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실에 대해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호산나!’ 하며, 소리쳤습니다. ‘호산나’ 는 ‘이제 구원하소서!’ (히브리어) 라는 뜻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만세’ 라는 뜻입니다.

 

군중들이 외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9절) 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어려서부터 암송하는 시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할렐’-‘할렐루야’ 란 시, 시편113편-118편의 마지막 부분, 시편 118편25절-26절, 장막절(초막절)때, 백성들이 기쁨으로 제창하는 시이기도 함¶

 

시편의 마지막 부분은, 시편 118편 25절에서 26절인데,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암송하던 시편의 주인공, 곧 구원의 메시야를 만났다고 생각하고, 지금 그 기쁨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힘차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더욱 힘차게 ‘호산나’를 부르며, 찬송하였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 메시야를, ... ... 그렇게 열망하던 그 메시야를, .... 지금 그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보고 있다는 감격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군중들은, 이제 예수님이 로마제국을 무찌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 민족에게 자유를 주시고, 전 세계를 통치하실 거사(擧事)를 이루실 것이라고 굳건하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대로,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들이 소망하는 그런 메시야가 아니십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로마와 세계를 정복하는 메시야는 아니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군중들의 열렬한 환영에 반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도 군중들에게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길 가에 있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가실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죽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가시로 만든 관을 쓰시고, 고난 받는 왕으로서 죽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으시고, 자기를 믿는 모든 자의 죄를 사해 주기 위해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에 있는,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였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군중들은 예수님이 그들이 원했던 메시야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로마를 무찌르고, 세계를 정복할 메시야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돌변합니까?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열렬히 환호하던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고 소리 지릅니다. ‘호산나!!’ 승리의 찬송을 부르던 그들이 ‘예수를 죽이라’ 고 소리 지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부르며, 곁에서 호위하며, 왕으로 모신 그들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모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군중들의 열렬한 환호와 찬송을 받으며 가고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이들이 자신을 모욕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 고 빌라도에게 요구할 사람들임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알고 계시면서, 묵묵히 자기 길을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고난 받는 왕으로서 십자가의 길을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얼마 후, 가룟유다는 예수님이 자기 기대와는 다른 모습을 보면서, 결국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얼마 후, 이스라엘 공동체는 예수님이 자기들이 원하던 메시야가 아님을 알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오늘날의 사람은 예수님이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야가 아니라면, 어떻게 합니까? 오늘날의 사람은 예수님을 외면함으로써 예수님을 버립니다.

 

우리는 지금 예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예수님이 내 삶의 중심에 있습니까? 우리는 예배당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먼 곳에 버리고 오지는 않았습니까? 내 마음에는 예수님이 전혀 없고, 내 몸뚱이만 앉아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한국교회의 위기를 여러 말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된 사실에 대해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 것은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사람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세상의 온갖 것들을 교회 속으로 들여오지는 않았습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가용 안에 장식으로 매 단, 악세사리 십자가처럼 전락시킨 것은 아닙니까?

 

•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신다면, 우리 삶이 이렇게 영적으로 메마를 수는 없습니다.

• 예수님을 참으로 교회의 주인으로 모신다면, 우리 교회가 이렇게 영적으로 메마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 우리 신앙의 현주소를 찾읍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시는 이 날을 맞이해서 한국 교회의 현주소를 찾읍시다.

 

‘지그문트 겟치’ 라는 화가가 '버림받은 예수' 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 내용은 이렇습니다.

 

성바울 대성전의 계단에 예수님이 서 있습니다. 그 주변에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스포츠 신문에 열중한 청년, 휴가 여행을 위하여 택시를 잡으려는 남녀, 길을 가면서도 시험관을 들여다보고 있는 과학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중, 아무도 예수가 성바울 대성전의 계단에 서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둔 사람은 없습니다. 신부 서너 명이 둘러서서, 성경에 대해 열렬히 토론하고 있지만,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서, 간호사 제복을 입은 한 여성만이 잠깐 멈추어 곁눈으로 예수를 보는 것이,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표현하는 유일한 장면입니다.

 

이 그림은 현대의 기독교인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세상 끝날 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는 말씀은 예수만의 일방적인 약속으로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 약속을 지금도 지키고 계시는데, 우리는 주님을 떠나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의 생활 전체로 볼 때, 과연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시험 준비 때문에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시험 준비보다도 비중이 낮은 존재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인가? 회사에서 몇 십 만원을 더 벌기 위해 주일성수를 거부할 것인가?’ 라는 선택에서, 몇 십 만원 더 벌기 위해, 예수님을 멀리 보내 버린다면, 예수님은 나에게 몇 십 만원 보다 못한 존재입니다.

 

하루 중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지금 사귀고 있는 애인에 대한 생각 보다 적게 한다면, 예수님은 지금 사귀고 있는 애인 보다 못한 존재입니다.

 

마태복음 11장 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 고 말씀하십니다. (눅7:23)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는 말씀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 실망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업신여기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삶 속에서 예수님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 삶의 영역에서 예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 삶에서 이 기준을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시험 준비와 주일성수가 겹칠 때, 주일성수를 택해야 합니다. 돈 몇 십 만원 보다, 예배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사귀고 있는 애인 보다 예수님을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내 남편 보다, 내 아내 보다, 내 자식 보다, 예수님을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를 존귀하게 여겨 주십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통해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로마를 무찌르고 구원해 줄 이스라엘의 왕으로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자의 죄를 사해 주시고, 구원해 줄 새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자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흠이 없는 숫양이라야 했습니다. 병든 것, 죽은 것, 절름발이, 눈먼 것, 여윈 것, 윤기 없는 것, 불완전한 것은 제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죄를 지고 간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른 흠이 없는 속제 제물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아무른 흠이 없었기에, 하나님 앞에 완전한 속죄 제물이 되십니다. (요1:29)

 

어느 의사가 오랫동안 인체에 대해서 살펴 본 결과, 인체에 흠이 없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소의 차이는 있을 뿐, 머리에서 발톱까지 어느 곳, 한 곳 에는 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도 사람에게는 원죄 때문에, 탐욕, 시기, 질투, 교만, 간사함, 허위, 이기심, 게으름, 음란, 무례함, 불신, 불효, 성냄, 완악함, 강퍅함, 술취함, 쾌락, 거짓 등 흠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른 흠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일절 무흠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께 제물로 바칩니다. 그것이 십자가상에서의 죽으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모든 자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자신을 믿는 모든 자의 제사장이요, 왕이 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빵의 ‘메시야’ 라면, 배는 잠깐 부르겠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인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정치적인 ‘메시야’ 라면, 사람들의 압제에서 잠깐 벗어날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인 안식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의 짐을 지시고, 죽으셨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내 영혼의 안식을 기원하며,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죄를 사해 주신 구원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저녁에라도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죄를 사해 주신 구원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왕’ 이십니다. 그를 믿는 모든 자, 곧 새 이스라엘의 ‘왕’ 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치적인 메시야로 알고, ‘호산나’ 외쳤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속제제물이 되신 메시야로 알고, ‘호산나’ 외칩시다. ‘구원의 하나님, 만세’ 라고 외칩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치적인 메시야로 알고,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랐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속제제물이 되신 메시야로 알고, 우리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주님 곁을 따릅시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을 존귀하게 여기며, 주님을 섬기며, 주님을 열렬히 환호하며 따르자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존귀하게 여깁니까? 어떻게 주님을 섬깁니까? 어떻게 주님을 열렬히 환호하며 따릅니까?

 

•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 주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 일상의 삶에서, ‘주님이 최고야!!’ 라고 말하고, 그렇게 생활하는 것이 주님을 열렬히 환호하며 따르는 것입니다.

• 이제는 더 이상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은 하지 맙시다. 주님 중심적으로 신앙생활 합시다. 이것이 주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 이제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맙시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에게 눈을 돌립시다. 누가 보더라도, 약한 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우리 눈을 돌립시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 이제 자기변명의 기도는 그만 둡시다. 주님께 통곡하며 회개합시다. 내 영혼을 다하여 찬양합시다. 모든 삶의 시험들을 믿음으로 극복합시다. 이것이 주님을 열렬히 환호하며 따르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겸손의 왕’ 으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그는 ‘겸손의 왕’ 이시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을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이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말씀합니다.

어떤 왕이 ‘겸손의 왕’ 입니까? 힘이 있으시지만 군림하지 않는 왕이 겸손의 왕입니다. 백성을 살리기 위해 낮은 자리로 가는 왕이 겸손의 왕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 목회자들이, 그리고 교회 중직자들이 그 누구 보다 ‘겸손의 왕’ 그리스도를 본 받아야 합니다. 군림해서는 안 됩니다. 낮은 자리로 가야 합니다. 낮은 자리로 가는 체, 해서는 안 됩니다. 정말, 낮은 자리로 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목사에 대해, ‘카리스마’ 가 있다고 말합니다. ‘카리스마’ 가 있어서 부교역자를 잘 다루고, 성도들을 잘 휘어잡는다는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 목사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설사 ‘카리스마’ 가 있어서 부교역자를 잘 다루고, 성도들을 잘 휘어잡는다 해도, 그는 예수님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겸손의 왕’ 이시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카리스마를 가지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카리스마는 ‘겸손’ 의 카리스마입니다. 겸손하여서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백마 탄 왕자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면, 가난한 자가 가까이 올 수 있었겠습니까? 허리에 번쩍이는 칼을 차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면, 병들고 약한 자가 가까이 올 수 있었겠습니까? 망토를 휘 날리면서, 혜성과 같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면, 천대 받던 고아와 과부들과 사람 수에 들어가지도 못했던 여자들이 가까이 올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셔서 어린 나귀를 타셨기에, 이런 사람들이 가까이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셔서 어린 나귀를 타셨기에, 저와 여러분들의 그리스도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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