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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마가복음

마가복음 15장, 빌라도의 죄

by 영구한도성 2022. 8. 8.
6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7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9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6 Now at that feast he released unto them one prisoner, whomsoever they desired.
7 And there was one named Barabbas, which lay bound with them that had made insurrection with him, who had committed murder in the insurrection.
8 And the multitude crying aloud began to desire him to do as he had ever done unto them.
9 But Pilate answered them, saying, Will ye that I release unto you the King of the Jews?
10 For he knew that the chief priests had delivered him for envy.
11 But the chief priests moved the people, that he should rather release Barabbas unto them.
12 And Pilate answered and said again unto them, What will ye then that I shall do unto him whom ye call the King of the Jews?
13 And they cried out again, Crucify him.
14 Then Pilate said unto them, Why, what evil hath he done? And they cried out the more exceedingly, Crucify him.
15 ¶ And so Pilate, willing to content the people, released Barabbas unto them, and delivered Jesus, when he had scourged him, to be crucified.
 

6 名節이 되면 百姓들이 要求하는 대로 罪囚 한 사람을 놓아 주는 前例가 있더니
7 民亂을 꾸미고 그 民亂中에 殺人하고 逮捕된 者 中에 바라바라 하는 者가 있는지라
8 무리가 나아가서 前例대로 하여 주기를 要求한대
9 빌라도가 對答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人의 王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願하느냐 하니
10 이는 그가 大祭司長들이 猜忌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11 그러나 大祭司長들이 무리를 衝動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 빌라도가 또 對答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人의 王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十字架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惡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十字架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滿足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十字架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마가복음 15장, 빌라도의 죄

 

 

 

빌라도는 유대의 제5대 총독입니다. (재임 26∼36) 그는 성격이 잔인해서 유대인들을 탄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인은 이런 빌라도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잔인한 성격의 빌라도를 이용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빌라도의 잔인한 성격을 이용하면 예수님을 사형시키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빌라도 법정 앞에 세운 이유는 일단 산헤드린 공회에는 사형집행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손에는 피를 묻히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공회에 사형집행권이 없어도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그것은 돌로 쳐 죽이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레위기 24장16절 말씀에 따른 종교적인 방법입니다. 스데반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스데반은 재판 없이 유대인들에 의해 돌아 맞아 죽었습니다.

 

문제는 신명기 17장7절의 율법에 따르면, 그 사람이 유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증명할 수 없으면서 먼저 돌로 치게 되면 오히려 돌로 친 자가 죄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돌로 쳐서 죽인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무척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돌로 쳐서 죽인다면 만에 하나 자기들에게 화가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이긴 죽이되 자기들의 손을 거치지 않고 죽이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것이 로마의 총독 빌라도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있는 비겁함 중에 하나가 이런 것입니다. 고소한 유대인들이 떳떳하다면 종교재판을 열어 예수님의 유죄를 입증해야 합니다. 그리고 종교재판에 따라 실형을 선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절차를 모두 무시하고 적대국의 손을 이용해서 사람을 죽이려 합니다. 빌라도의 손을 이용하겠다는 것 자체가 고소한 유대인이 정당하지 않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빌라도를 이용하고자 하지만, 이 날 빌라도는 호락호락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뒤집어씌우면 금방 유죄판결을 할 것 같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지도자들의 속셈이 너무 빤히 보였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시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고소한 것을 알았습니다. 로마법상으로 예수님이 처형 받아야 할 죄목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의 처형에 대해서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고소한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손에는 피를 묻히기 싫었듯이 빌라도 역시 자기 손에피를 묻히기 싫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처형에 대해서 가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자기 아내가 꾼 꿈 때문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7장19절을 보면, 빌라도의 아내는 자기가 꾼 꿈을 남편에게 얘기하면서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말아 달라.” 고 간청합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을 잔인하게 다루었던 총독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한 젊은이, 어느 목수의 아들 한 명을 죽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빌라도는 지금까지 피를 많이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처형 문제만큼은 가담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서 예수님을 무죄석방하지도 못했습니다. 빌라도는 고민에 빠져 들었습니다.

 

그래서 특사제도를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명절이 돌아오면 죄수 하나를 특사로 석방해 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유월절이었고, 민란과 살인죄로 ‘바라바’ 라는 흉악범이 구속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빌라도는 바라바를 이용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월절 특사로 바라바와 예수님 중 한 사람을 선택하라면 무리들이 예수님을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라바는 유대사회에서도 부담스러운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소문대로 여전히 인기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확신을 가지고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묻습니다. “유월절 특사로 누구를 원하느냐?” 그런데 의외의 답변이 나왔습니다. 대제사장들의 선동을 받은 무리들이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들의 의외의 답변은 빌라도에게 충격이었습니다. 바라바는 민란을 일으킨 살인자였습니다. 바라바는 유대사회에서도 격리대상에 속하는 흉악범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사람을 고치고 살리고 말씀을 전한 일이었습니다. 소외되고 가난한 자의 이웃으로 살아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무리들의 선택은 흉악범 바라바였습니다. 무리들이 흉악범 바라바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예수님을 처형하는 이 흉악한 자리에 무리들이 동참했다는 의미입니다.

 

그 무리들 중에는 예수님의 사랑과 도움을 실제적으로 받았던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 무리들 중에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찬양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은 까마귀 고기를 먹었는지 대제사장들의 충동질에 모두 넘어갔습니다.

 

빌라도는 다시 무리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을 내가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그러자 무리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외칩니다. 빌라도는 다시 묻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했단 말이냐?” 이 질문에 무리들은 더욱 소리지르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 고 외칩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상황이 그런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어떤 죄목도 찾을 수 없어서 도대체 무슨 악한 일을 했단 말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그것에 대해서 답변을 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 고만 외칩니다.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군중심리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이 어떤 악한 일을 했는지 답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악한 일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 고 부르짖을 따름입니다. 이것이 군중심리입니다. 군중심리는 한 가지 목소리는 있어도 그 목소리에 대한 정체성은 없습니다. 그 목소리의 내용과 출처도 없습니다. 왜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 고 하는지, 본인들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이처럼 무리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 고 외치자, 민란을 두려워하던 빌라도는 그 목소리에 굴복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았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8절을 보면, 그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겠노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이 시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고발한 줄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줍니다. 빌라도에게 이 큰 범죄를 피할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빌라도는 아내로 부터 꿈 이야기를 듣습니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 는 충고를 듣습니다.

 

그러나 그는 재판관으로서의 양심도 버리고 아내로 부터 받은 충고도 듣지 않습니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유대 총독 자리였습니다. 의로운 한 사람을 지키다가 민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민란이 일어나면 로마에서 문책도 당합니다. 빌라도는 이런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기의 이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처형합니다.

 

그러나 이 한 순간의 잘못으로 그는 세상의 영원한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할 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았다는 사실을 신앙고백으로 드립니다. 우리는 이 신앙고백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드립니다. 그 때 까지 빌라도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 속에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빌라도를 통해 하나님이 없는 한 인간의 가련함에 대해서 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향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가련한 인생을 면치 못합니다.

 

빌라도는 총독으로서의 자기 지위만을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빌라도의 가련함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런 저런 지위를 가지고 살기도 하고, 이런 저런 것을 누리며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덧없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어떤 이는 “영혼아 내가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밤 네 영혼을 찾는다면 그 많은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고 묻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빌라도처럼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소유하는 것입니다. 지위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고수하는 가운데 불안이 있고, 재산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지키려하는데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는 말씀하셨습니다. (마 6:20)

 

빌라도는 훗날 사마리아인들의 학살사건 때문에 로마로 소환되어 자살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빌라도는 민란이 두려워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내어 주었습니다. 그것은 민란으로 인해 로마로 소환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사마리아인 학살 사건’ 으로 인해 로마로 소환되었고, 정신적 압박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내어 주었지만, 나중에 결국 그 자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하늘나라의 풍요함을 살펴볼 줄 안다면 이 세상의 모든 영화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영화는 불확실한 것이며, 오히려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빌라도는 불확실한 이 세상 영화를 붙들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빌라도에게 있어 이 세상 영화는 가장 악독한 짓을 저지르게 만든 덫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빌라도의 양심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는 재판관으로서의 양심을 저버렸습니다. 그가 현실적인 계산보다 재판관으로서 양심을 지켰다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면 양심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판에 새긴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토마스아켐피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 받아’ 라는 책에 보면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그대가 올바른 양심을 지니고 있다면, 죽음을 크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을 피하는 것 보다 죄를 피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성령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새기신 양심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에 위배되는 것은 못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만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성령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면 그 심령이 평안하게 되지만, 불순종하게 되면 불안해 지게 됩니다.

 

우리가 빌라도의 죄를 보면서 이 세상의 것들에 연연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을 성령하나님 안에서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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