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5장, 책과 어린 양
요한복음 20장 30절과 31절을 보면,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여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이자 성경전체의 기록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여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믿는 자에게는 예수님 안에서 그 생명이 더욱 풍성하게 하고, 그 생명이 자라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1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삶에 지쳐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더 풍성히 얻어야 합니다. 미래가 염려가 되고 불안합니까?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더 풍성히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겪는 문제는 결국 생명의 풍성함이 부족한 데 있습니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문제는 끊임없이 발생합니다. 그 문제들 속에서 사람들은 지쳐갑니다. 삶의 의욕을 상실해 갑니다. 궁극적인 해결책은 그 한 가지 문제의 해결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해결책은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더 풍성히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잔치를 벌이는 사람은 영적 생명력이 풍성한 사람입니다. 생명이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내 삶의 어떤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보다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풍성한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풍성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두루마리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말씀합니다. 성경이 생명을 얻게 하는 책이라면, 성경에 기록된 두루마리에 대해서도 같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루마리의 내용에 대해서는 학자들 마다 조금씩 주장하는 바가 다릅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책이요, 세계의 운명에 관한 책입니다.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또 세계의 역사를 미리 기록해 놓은 책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어떤 사람의 출생과 성장과 죽음에 대한 기록일 수 있습니다. 구원받을 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을 수 있고, 멸망 받을 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 대한 인생의 기록이 이 두루마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일단 우리는 미래라는 시간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늘 저녁 일을 알지 못하고, 내일 아침 일을 알지 못합니다. 1달 후의 일을 알지 못하고, 1년 후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죽는 순간까지의 모든 시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추측이고 경험일 따름입니다. 오늘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 내일 아침에 일어나리라는 것도 내 추측이고 경험입니다. 어제 저녁에 잠을 자고 오늘 아침에 일어났으니, 오늘 저녁에 잠을 자면 내일 아침에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 아침에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100% 보장을 받고 오늘 저녁에 잠을 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내일 아침 일을 알지 못합니다. 내일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일을 알지 못하고, 내일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데 있어 본문의 책 두루마리는 어떤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미래의 모든 시간이 비밀이지만, 그 비밀이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밀이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미래의 모든 시간이 비밀이지만, 우연은 없다는 것입니다.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두루마리에 기록되지 않은 일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배경 속에는 ‘우연’ 이라는 단어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운전을 할 때 사고가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각별히 조심하게 됩니다. 혹이라도 사고가 나면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이라도’ 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연’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우연’ 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두가 ‘필연’입니다. 왜냐하면 모두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이런 일이 없었다면 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는 있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되면 과거에 후회스러운 일마저 하나님께는 있어야 할 일로 받아들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사연들을 몇 개 정도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께 사연이 없겠습니까? 하나님께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사연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분석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사연의 본질은 선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연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만큼은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삶 속에 있었던 모든 삶의 내용들 속에는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우연’ 이라는 것 속에는 ‘믿음’ 이라는 것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필연’ 속에는 ‘믿음’ 이라는 것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두루마리는 ‘필연’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모두가 ‘필연’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6절을 보면,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말씀합니다.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표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 때문입니다. 처음이자 나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시기에, 하나님 자신이 하실 일을 이미 하신 것처럼 두루마리에 기록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사람들이 생각하는 시간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 개념이 없습니다.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이자 마지막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과거의 일이지만,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께는 영원한 현재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가 미래의 일이지만,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께는 영원한 현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사건이 2,000년이 지난 우리에게도 왜 적용이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역시 영원한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2,000년 전에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나의 죄 때문에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만찬을 나눌 때 2,000년 전의 일을 단순히 기념하며 성만찬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만찬을 나눌 때 지금 잔을 나눠주시고, 지금 떡을 떼어 주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갓난아기였을 때도 영원한 현재 속에서 만나셨고, 지금도 영원한 현재 속에서 만나시며, 미래에도 영원한 현재 속에서 만나십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현재이시기에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두루마리의 기록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합니까? 우리는 두루마리의 기록을 영원한 현재 속에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는다면 두루마리는 지금 내 구원에 대한 기록의 책입니다. 그리고 두루마리는 세상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나를 지금 구원해 내시는 섭리의 책이자, 세상 멸망의 세력으로부터 지금 나를 벗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담긴 책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두루마리는 공포스러운 책이 아닙니다. 믿는 자들에게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증하는 책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말씀합니다. 시험도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지만 피할 길도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두루마리는 단순히 결정된 미래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기록이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기록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계획은 결정된 미래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두루마리는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 닫힌 책이 아니라, 미래에 대해 열려 있는 신비의 책입니다.
미래에 대해 열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해 열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능동적인 자세를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상황에 있습니까? 배수의 진을 치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막다른 골목에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두루마리는 결정된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를 받으시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신실함을 보증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8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두루마리를 취하실 때 어떤 일이 있습니까?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두루마리를 취하실 때 성도들의 기도를 받게 됩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없는 두루마리는 있을 수 없고, 두루마리가 없는 성도들의 기도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약속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두루마리가 일곱 인으로 봉하여 져 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신비이기 때문에 봉하여 져 있습니다. 또 하나는 언제까지나 두루마리가 비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두루마리는 일곱 인을 뗄 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두루마리는 결국 펼쳐지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누가 이 두루마리의 인을 떼느냐 하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여기서 큰 음성은 우주 끝까지 들리는 음성입니다. 우리는 별의 거리를 뜻하는 말로, ‘광년’ 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1광년이라면 빛의 속도로 1년을 가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가 1광년입니다. 현재 과학자들에 의하면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별이 안드로메다대성운인데, 거리가 252만 광년입니다. 지구에서 빛의 속도로 252만년을 가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큰 음성이라는 것은 이렇게 먼 별까지, 우주 끝까지 들리는 음성입니다. 이렇게 큰 음성으로 외쳐야 하니 힘 있는 천사가 외쳐야 합니다.
힘 있는 천사가 이렇게 큰 음성으로 외쳤지만, 요한이 이상 중에 보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었습니다. 우주의 그 어느 구석에도 두루마리의 인을 뗄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크게 울었습니다.
여기서 크게 울었다는 것은 통곡했다는 것입니다.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어서 요한은 통곡했습니다.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다는 사실이 왜 통곡하는 이유가 됩니까? 즉, 두루마리는 펼쳐져야 하는데, 펼쳐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이것은 6장부터 21장까지 이어지는 내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몇 가지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6장에는 일곱 봉인에 담긴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9장에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20장에는 천년왕국과 사탄의 패망이 기록되어 있고, 21장에는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22장에는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2:2)
특히 요한계시록 22장 16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웅장한 자기소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일곱봉인에 담긴 심판이 없다면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없습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 후에 천년왕국과 사탄의 패망,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합니다. 즉 일곱봉인에 담긴 심판을 시작으로 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하나님 역사는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그래서 일곱 인은 하나씩 하나씩 떼어져야 합니다.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쳤지만 일곱 인을 뗄 자가 우주 어느 구석에도 없어서 요한이 크게 울고 있을 때, 장로 중의 한 사람이 요한에게 말합니다.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다윗의 뿌리라는 것은 약속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6절 상반절을 보면,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말씀합니다. 일찍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에게 일곱 인을 뗄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 것입니다. 일곱 인을 뗄 수 있는 능력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루마리의 내용이 죄에 대한 것, 사망에 대한 것, 생명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6절 하반절을 보면, 그 어린 양의 모습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그에게는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말씀합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함과 온전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일곱 뿔은 전능함을 뜻합니다.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표시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눈은 모든 땅으로 보냄을 받은 성령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그리스도께서 보지 못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어린 양의 전지하심, 무소부재하심을 뜻합니다. 일곱 뿔과 일곱 눈은 곧 어린 양이 하나님 되심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어린 양이시면서 하나님이십니다. 어린 양이시면서 하나님이신 그가 무엇을 하십니까?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십니다. 아마도 그리스도께서는 그 두루마리를 당당히 취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그 두루마리의 인을 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8절 상반절을 보면, 어린 양이 그 두루마리를 취하실 때, 네 생물들과 이십사 장로들이 거문고를 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문고는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을 찬양하기 위해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찬양의 노래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9절부터 13절까지입니다.
찬양의 노래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어린 양은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십니다. 왜냐하면 일찍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어린 양은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습니다. 그들이 왕노릇하게 하셨습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돌립니다.’
생물들과 장로들이 이 노래를 부를 때 그 곁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는데,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말씀합니다. 이 천사들의 음성은 우주 끝만이 아니라 이 우주 끝을 뚫고 나가서라도 들리도록 하는 크고 웅장한 음성들입니다. 마치 이것은 2절에서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고 물었을 때, 만만이요 천천의 천사들이 더 큰 소리로 ‘그 인을 떼기에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합당하다.’ 고 답변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 산 제물이 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는 일찍이 죽임을 당하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권세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셔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만만이요 천천의 천사들의 음성을 들으면서 생명을 주신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책이며,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보증하는 책입니다. 결국 두루마리에 기록된 모든 일들은 이루어 질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는 요한계시록 22장을 향해서 빠른 속도로 달려갈 것입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해가 바뀜에 따라 그 섭리대로 이루어 나가시며, 하나님은 그 섭리대로 이루어 나가시니 그 때가 가까워진다. 그 때는 점점 더 가까워 오니, 그 때는 틀림없이 올 것이다. 그 때에는 물이 바다를 덮듯이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가득하는 때라”
결론적으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되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을 향해 지금도 달려가고 있는데, 우리의 신앙은 과거의 상처와 분노에 머물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현재와 미래의 삶마저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아등바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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