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성경/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7장, 십사만사천 144000

by 영구한도성 2022. 8. 10.
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3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4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1 이 일 後에 내가 네 天使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四方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各種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2 또 보매 다른 天使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印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害롭게 할 權勢를 받은 네 天使를 向하여 큰 소리로 외쳐
3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印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害하지 말라 하더라
4 내가 印침을 받은 者의 數를 들으니 이스라엘 子孫의 各 支派 中에서 印침을 받은 者들이 十四萬 四千이니
 

1 And after these things I saw four angels standing on the four corners of the earth, holding the four winds of the earth, that the wind should not blow on the earth, nor on the sea, nor on any tree.
2 And I saw another angel ascending from the east, having the seal of the living God: and he cried with a loud voice to the four angels, to whom it was given to hurt the earth and the sea,
3 Saying, Hurt not the earth, neither the sea, nor the trees, till we have sealed the servants of our God in their foreheads.
4 And I heard the number of them which were sealed: and there were sealed an hundred and forty and four thousand of all the tribes of the children of Israel.

 


요한계시록 7장, 십사만사천  144000

 

 

 

‘인을 치다’ 는 것은 도장을 찍는 것을 말합니다. 거래관계에서 도장을 찍는 것은 쌍방간에 거래내용에 대해 보증하는 것을 뜻합니다. 세례증서에 교회의 직인을 찍는 것은 세례증서 발급처의 영적권위를 보증하는 것을 뜻합니다.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권을 빼앗을 때 사람을 시켜서 강제로 옥새를 빼앗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옥새(玉璽)가 가지고 있는 위력은 알 수 있습니다. 임금이 찍는 도장 곧 옥새는 왕권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인치심을 받은 자들은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이 찍힌 사람들입니다.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이 찍힌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유물이라는 뜻이고,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도장이 찍힌 사람들은 그 누구도 해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종들에게 이마에 인을 치기까지 긴박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말씀합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칩니다. 하나님의 인을 가진 천사가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고 요구합니다.

 

땅과 바다와 각종 나무를 해할 바람이 목전(目前)에 있는 상태이고 네 천사가 이 바람을 붙잡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있는 다른 천사들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기 직전의 상태입니다.

 

1절에 기록된 바람에 대한 해석이 2가지입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 자연계의 바람입니다. 자연계의 바람을 뜻할 때는 전세계를 파괴할 만한 강력한 바람으로서 천재지변을 일으켜 대환난을 가져오는 바람입니다. 이 바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바람입니다. 또 하나는 영적인 바람입니다. 이 때 바람은 성령의 바람이 아니라 악령의 바람입니다. 이 바람은 하나님의 교회를 극심한 혼란에 빠뜨리는 어둠의 권세입니다. 거짓선지자가 일어나서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바람입니다.

 

1절에 기록된 바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바람으로 볼 수도 있고, 교회를 극심한 혼란에 빠뜨리는 악령의 바람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날이 가까워올수록 자연계는 더욱 혼란해 지고, 마지막 날이 가까워올수록 교회의 영적상태도 더욱 혼란해 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져서 세상이 훨씬 더 삭막해 지는 것도 악령의 바람입니다. 도덕성이 더 상실되고 죄의식이 더 마비되어 무법천지가 되는 것도 악령의 바람입니다.

 

그러나 인치심을 받은 자들은 천재지변도 해할 수가 없고,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악령의 권세도 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이 더욱 삭막해져 사회가 무법천지가 되어도 인치심을 받은 자들은 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바람이 자연계의 바람이든, 악령의 바람이든 하나님의 통제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들이 인치심을 받기 전까지는 자연계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고, 악령도 그들을 해치지 못합니다.

 

천재지변이 쓸고 가고, 악령의 권세가 쓸고 가는 사람은 인치심을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인치심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예배당 안에 있어도 그 세력에 쓸려 나갑니다. 반대로 인치심을 받은 사람은 폭풍우가 부는 바다 한 가운데에 있어도 보호를 받습니다.

 

천재지변으로부터 보호하고, 악령의 권세로부터 보호하는 ‘하나님의 인’ 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입니다. 에베소서 1장13절을 보면,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말씀합니다. 약속의 성령을 받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장이 찍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을 때 보편적인 경우 긴박감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긴박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본문의 상황의 배경은 사도요한 시대에 임박한 환난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배경은 임박한 세상종말의 시대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사도요한 시대나 임박한 세상종말의 시대로 국한해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지금의 상황이고 마지막 날이 가까워올수록 더욱 긴박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기 직전에는 보편적으로 악령의 공격이 있습니다. 악령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도록 두고 보지 않습니다. 본문의 바람을 악령의 바람으로 볼 때 이것은 공중의 권세잡은 자 사단의 역사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8절을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말씀합니다. 마귀는 떼를 지어 몰려다닙니다. 이들은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 적극적인 공세를 폅니다. 그래서 교회가 있는 곳에 악령의 역사가 큽니다.

 

이러한 공세 앞에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이마에 인을 치기까지는 해하지 말라.’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도 하나님의 종에게 인을 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지진이 일어나고 가공할만한 쓰나미가 몰려 와도, 심각한 교회의 혼란이 초래되어도 하나님의 종에게 인을 치기 전까지는 멈추어 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이 세상에 보이는 사건이 있기 전에 보이지 않는 영적 사건이 먼저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욥기 1장을 보면, 욥이 자녀와 재산을 잃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욥기 2장을 보면, 욥의 육체를 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욥이 이러한 고난이 있기 전에 천상(天上)의 사건이 먼저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그것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있은 후, 욥이 고난을 당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의 사건이 있은 후, 욥이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사탄의 대화가 있은 후, 욥이 고난을 당하지만 사탄이 모르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의 고난을 허용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연단하시기 위해 고난을 허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욥에게 더 깊은 영적 비밀을 알려 주시기 위해 고난을 허용하셨습니다. 욥은 처음에 그 고난이 힘들기만 하였지만 그는 나중에 자기를 연단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더 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길이 있고, 사탄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있고, 사탄이 하는 일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이 서로 대등한 상태에서 겨루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탄은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해 멸망 받은 존재입니다. 사탄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강력한 권세는 죄와 사망권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권세를 멸하셨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죽이면 자신이 승리자가 될 줄 알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죄와 사망권세를 멸하게 하셨습니다. 아들이 승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탄이 알고 있는 것은 지나간 과거의 일과 자기 운명에 관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 그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모든 것에 능력을 행하십니다. 사탄은 어떤 사람을 해하려고 할 때 그 사람의 운명을 알고 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속이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 사탄의 속성이기에 그렇게 행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의 운명을 압니다. 처음부터 그가 택한 백성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처음과 끝도 압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지금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도 아십니다.

 

그리고 사탄이 아무리 무언가에 대해 계획을 해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탄이 욥의 자녀와 재산과 육체를 칠 때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을 허락했지만 욥의 생명은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욥과 대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욥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 때 욥은 하나님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떤 일에 대해서 표면적인 부분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배후에는 영적인 사건이 먼저 있습니다. 그 영적 사건의 배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고, 하나님의 지키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치심이 있습니다.

 

사탄은 일시적으로 세상임금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이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영적 부분에 대해서 알고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심각한 불안 속에 휩싸이다가도 기도 중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로 그 일을 평정시켜 놓으셨음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기도는 현실의 세계를 뛰어 넘어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매개체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바다 위를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때 기도라는 것은 ‘물 위로 오라’ 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걷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서 빠져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하나의 영적 비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람 보다 먼저 있었던 것은 ‘물 위로 오라’ 는 예수님의 말씀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바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현실의 바람을 보아서는 안 되고 먼저 하신 말씀 ‘물 위로 오라’ 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람은 주님의 말씀 속에 항상 통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풍파 속에 시름할 때 말씀을 먼저 선포해야 하고, 구원의 문제에 대해 의심케 하는 세력에 대해서도 말씀을 먼저 선포해야 합니다. 선포하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인을 치셨는지 여부도 복음 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13절에서,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믿는 가운데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는 가운데 새로운 생명이 탄생합니다. 복음은 논리가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원천(源泉)과 같은 것입니다. 복음은 믿음과의 결합을 통해서 끊임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 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내게 성령의 인치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피조물은 성령으로 인해 거듭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것과 같습니다. 태아는 어머니 자궁 속의 양수에 떠 있는데, 그 양수가 태아에게는 가장 아늑한 곳이고 평화로운 곳입니다. 태어난 후에는 어머니 젖가슴이 가장 아늑한 곳이고 가장 평화로운 곳입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어머니 젖가슴에서 심장박동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태아는 자궁 속의 양수에서 생명을 느끼고, 태어나서는 어머니 젖가슴에서 생명을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은 성령 안에서 가장 아늑하고, 성령 안에서 가장 평화로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은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 가장 행복하고, 주의 말씀을 묵상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세상음악 보다 찬송이 즐거워집니다. 과거에는 정욕을 즐기는 마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정욕적인 생각이 들 때 머리가 아파지고 구역질이 생깁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통해서 내게 성령의 인이 쳐져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은 백성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시편23편4절을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노래합니다. 시한부 인생을 보내는 병상에서도, 전쟁터에서도,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은 백성은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4절 말씀은 많은 이단 종교에서 이용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이단 종교들에서는 십사만 사천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합니다. 다른 성경말씀은 지나칠 정도로 상징적으로 해석하는데, 십사만 사천만큼은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특히 자기들의 종교를 통해서만 십사만 사천 안에 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종교를 통해 십사만 사천 안에 들도록 긴박감을 조성합니다. 집도 팔게 하고, 땅도 팔게 하고, 부모, 자식도 버리게 합니다.

 

그들은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자기들의 배를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의 사람 아담에서 노아까지 인류의 역사를 창세기 5장을 근거로 해서 살펴보면, 대략 1656년이 됩니다. 그리고 아담에서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약 6000년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6,000년으로 볼 때 단순 계산을 하면 이렇습니다. 1년에 겨우 24명이 구원 받으면 6,000년 동안 144,000명이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산술적인 계산만으로도 그들이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들의 주장이 더욱 터무니없는 것은 자기들 종교에만 144,000명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지금까지 모든 믿음의 사람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이단 종교는 이미 그들이 말하는 144,000명을 넘었습니다. 그들의 교리대로라면 포교활동을 중단해야 합니다. 144,000명이 찼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적당한 교리를 또 하나 만들어 공격적인 포교활동을 하는 것은 모순을 스스로 자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사만 사천이란 숫자에 대하여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 숫자가 모든 세대에 걸친 성도의 수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아담부터 세상종말까지 구원받는 성도의 수가 144,000명이 아닙니다. 좁은 의미에서 십사만 사천이란 수는 요한이 살고 있던 시대에 곧 닥쳐 올 대 재난으로부터 인침을 받아 생존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넓은 의미에서 십사만 사천입니다. 십사만 사천이란 수는 한정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완전성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12는 완전수입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 예수그리스도의 12제자가 뜻하는 것도 완전수를 뜻합니다. 완전한 이스라엘, 완전한 제자공동체가 12입니다. 12에 12를 곱하면 144가 나오는데, 본문의 144,000명이라는 것은 144를 1,000배 해서 전부를 포괄하는 완전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44,000명이라는 것은 구원 받는 자의 수가 매우 적은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구원 받은 자의 수가 매우 크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16장31절을 보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믿는 자는 모두 구원받는데 그 수가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허다한 무리의 구원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9절을 보십시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모두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144,000명이라는 숫자는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하다는 것입니다. 즉 완전한 구원입니다. 마태복음 18장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말씀하십니다.

 

그 한 마리의 잃은 양이 누구입니까? 세상 종말이 오기 전에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게 될 마지막 양입니다. 이 마지막 양까지 구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며 완전한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144,000이라는 숫자에 담겨 있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하나님은 단 한 사람도 놓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이단종교들이 요한계시록을 통해 두려움을 심고, 그 두려움을 이용해 포교활동을 하고, 그 두려움을 이용해 자기들의 배를 채웁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두려움을 심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은 택한 백성의 구원을 보증하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에 더욱 믿음으로 살아야 함을 요청하는 말씀이며,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지키신다는 것을 보증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보다 분명히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요한에게 환상을 통해 새하늘과 새땅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두려움을 가지기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심을 다시 한 번 더 고백하는 말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