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7장, 흰 옷 입은 자들
우리나라가 못 살고 힘이 없을 때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국여행을 가면 한국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워서 일본인이라고 속이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각 나라마다 잘 살던 때가 있었고, 못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강했던 때가 있었고, 약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국가뿐만 아니라 민족도 그렇습니다. 앵글로색슨족과 게르만민족이 강했던 때가 있었고, 슬라브민족이 강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정복자의 위치에 있었던 민족은 자기 민족에 대한 우월감이 있습니다.
국가나 민족뿐만 아닙니다. 한 국가 내에서도 우월한 계급과 열등한 계급이 존재합니다. 고대 노예제 사회가 있었고, 중세 봉건사회가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양반과 천민 계급 사회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계급사회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가 그것입니다. 고대 유대사회에서는 여자와 어린아이는 사람 수에도 속하지 않았고, 오늘날의 이슬람국가들은 여성들에게 인권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처럼 어느 나라 사람인가? 어느 민족인가? 어떤 계급에 속해 있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사회에 따라 남자인가? 여자인가? 라는 사실도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는가 하는 것도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성경에도 그러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국가에 대한 것, 민족에 대한 것, 계급사회에 대한 것, 여자가 천대받던 시대에 대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세리와 창녀는 대표적인 죄인으로 취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처럼 국가나 민족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 있으면서, 동시에 한 개인의 인생사에 대한 기록이 있고, 어떤 부류에 속한 사람들의 삶의 애환이 담긴 기록들도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의 역사가 있고, 민족의 역사가 있으며, 개인의 인생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러한 모든 것들을 초월하는 종족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 종족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있는 종족입니다. 9절을 보면, 이 종족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종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이 무엇을 말해 줍니까? 결국 인류는 단 2가지의 종족으로 나누어집니다. 여기에는 국가의 개념도 없고, 민족의 개념도 없으며, 계급의 개념도 없습니다. 남자의 개념, 여자의 개념도 없습니다. ‘어떤 집안 사람인가?’ 라는 것도 없습니다. 유일한 것은 흰 옷을 입은 종족과 흰 옷을 입지 못한 종족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느 나라 사람이었던가? 어느 민족이었던가? 남자였던가? 여자였던가? 어떤 집안사람이었던가? 부자였던가? 가난했던가? 이런 것들이 전혀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가지를 손에 들고 서 있는 종족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역사도 끝나고, 민족의 역사도 끝나고, 이 세상에서 개인의 인생사도 끝나는데, 끝나는 그 시점에 새롭게 시작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 역사는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하나님의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게 됨으로써 시작되는 역사입니다.
이들은 새 이스라엘입니다.
5절에서 8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유대적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약의 기본 사상은 교회가 참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9장 6절에서 8절을 보면,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참 이스라엘은 교회이며,(갈6:16) 교회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엡1:4) 그러므로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12지파는 새 이스라엘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받은 믿는 자들의 무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각 지파가 일만 이천 명인데 총12지파를 곱하면 십사만 사천명입니다. 십사만 사천명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완전수 12에 12를 곱하면 144가 되는데, 이것을 1,000배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사만 사천명은 문자적인 십사만 사천명이 아니라 완전한 이스라엘, 곧 하나님께서 택한 이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받는 허다한 무리 새 이스라엘을 뜻하는 것입니다.
새 이스라엘, 곧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선 무리들이 큰 소리로 외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10절을 보면,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12절을 보면, 모든 천사가 경배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경배의 내용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라는 것에 대한 화답입니다. 천사들은 구원의 하나님에 대해서,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라고 화답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구원받아야만 할 존재라는 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어린 양과 나와의 관계성이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구원받아야 할 실존을 가졌다는 사실 속에서 어린 양과 나와의 관계성이 시작됩니다. 어린 양은 나를 위해 일찍이 죽으셨습니다. 어린 양이 나를 위해 일찍이 죽으셨다는 사실은 그를 믿는 자는 어린 양과 더불어 운명공동체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그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의 다시 살아나심이 곧 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합니다.
늪에 빠진 사람에 대한 구원은 그 사람을 늪에서 건져 내 주는 것입니다. 빚을 졌는데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 대한 구원은 그 빚을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에 대한 구원은 그 질병이 고침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이미 죄의 늪에 빠진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도저히 갚은 수 없는 죄의 빚을 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고칠 수 없는 죄의 질병에 걸려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 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빠져 나올 수 없는 ‘늪’ 과 같은 것이고,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 과 같은 것이며,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질병’ 과 같은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어린 양이 담당하신 것입니다. 새 이스라엘은 어린 양이 이것을 담당하셨다는 것을 믿는 무리들입니다.
그렇기에 어린 양과 새 이스라엘은 서로 아는 사이입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라고 외치고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 라는 것은 이미 어린 양에 대해서 알고 있는 친숙한 ‘우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14절과 15절을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 날 생소한 하나님, 낯 선 주님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익히 알고 있던 하나님, 늘 동행했던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 안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그 분을 보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12절을 보면,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말씀합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을 거울로 보는 것 같지만 분명한 사실은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을 부분적으로 알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고 있다는 것, 알고 있다는 것은 표면적인 관계성이 아니라 이면적인 관계성을 뜻합니다. 즉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서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것이 이면적인 관계성입니다.
그리고 보고 있다는 것, 알고 있다는 것은 신뢰의 관계성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양들이 범죄를 해도 끝까지 긍휼을 베풀고 믿어 줍니다. 다시 돌아올 것을 알고 믿어 줍니다.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이 아들을 믿어 줍니다.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범죄를 하고, 아버지 곁을 떠날 때가 있지만 늘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합니다. 결국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흰 옷을 입은 자들은 이 세상 삶 속에서 그런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날 흰 옷을 입은 자들은 ‘우리 하나님’ ‘우리 어린 양’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동안 알고 있는 주님을 완전히 보게 되는 그 날은 참으로 감격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라는 것은 감격의 그 날을 준비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신약의 서신서들을 보면 그 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서도 그러합니다. 바울의 서신서는 전기 바울서신서와 후기 바울서신서가 있습니다.
전기 바울 서신서는 1세기 중에서 50년대에 기록된 것인데, 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빌레몬스, 고린도전후서, 로마서입니다. 이 서신서들은 임박한 종말을 준비하는 시간적 긴박감 속에서 기록되었습니다. 마치 종말이 조만간에 이루어 질 것으로 보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결혼문제에 대해서도 결혼하는 것 보다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권면합니다.
한편 후기 바울 서신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종말시대인 것은 맞지만 종말이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신에 대해서 그렇게 강조하지 않고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결혼이 무엇이며, 그 결혼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그 날을 사모하는 신앙인의 자세는 이 세상 삶에 충실하면서도 임박한 재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 세상 어느 곳에서 정착해서 열심히 살지만 그 영혼은 이 세상에 정착하지 않고 나그네처럼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성실히 살아가면서도 궁극적으로 영적인 것을 사모합니다. 그리고 그 날을 갈망합니다.
성도들은 예배를 통해 그 날에 대한 갈망이 고조되어야 합니다. 시편 5편 7절을 보면,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라는 시가 있습니다.
주의 집이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바이트’ 라고 하는데, 장막집을 말합니다. 이 장막집은 시온에 있는 다윗의 기도처를 뜻합니다. 그 집은 초라하고 볼품이 없는 집이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초라하고 볼품이 없는 장막집에서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였다는 것은 다윗에게는 세상 여러 왕들과 달리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갈망 때문에 다윗은 초라하고 볼품이 없는 장막집으로 향하곤 했습니다.
우리들에게 있어 장막집은 예배당일 수도 있고, 골방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있어 장막집은 서재(書齋)일수도 있고, 옥탑방(屋塔房)일수도 있습니다. 내가 홀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그 장소는 내게 ‘장막집’ 이 됩니다. 초라하고 볼품이 없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나만의 공간이 있다면 그곳은 내게 ‘장막집’ 이 됩니다.
다윗은 그렇게 초라하고 볼품이 없는 장막집을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장막집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다윗만의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으로서 승승장구할 때도 하나님만을 바라보았고, 전쟁터 속에서 목숨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있을 때도 하나님만을 바라보았고, 도망자로 있을 때도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지칠 때 다윗처럼 ‘나만의 기도의 장소’ 로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반면 세상에서 성공하여 세상만 보이는 유혹의 시기에는 더더욱 ‘나만의 기도의 장소’ 로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장소에서 하나님만을 갈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장소에서 흰 옷을 입고 종려 가지를 들고 하나님 보좌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인류역사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때가 되면 이 세상의 인류역사가 끝납니다. 저절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 하나님의 권능 속에 그것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의 인류역사를 끝내시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두셨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싫어합니다. 특히 가족끼리는 더 싫어합니다.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얻은 생명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얻은 생명입니다. 우리는 육체자체와 육체에 관한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십자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자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겪는 영적 갈등은 육적자아에 매이고 그것을 사랑하는데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모든 육적자아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깊이 묵상하고 그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생명의 고귀함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는 연습을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사는 연습을 합니다.
14절을 보면,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사람들을 가리켜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사람들은 좁은 의미에서 순교자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며 살다가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지해서 죽은 모든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인생 자체는 큰 환난의 소용돌이 속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며 매 순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환난을 이겨내고 죽음의 터널을 지나는 순간에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터널을 지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는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또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새로운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심각한 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삶의 애환이 있고, 아픔이 있고, 고통에 대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환난의 터널을 지날 때 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게 되고, 누구나 겪는 죽음의 터널을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해 지나가게 되며, 결국 그 주님을 극적으로 만납니다.
주님을 극적으로 만나게 될 때 어떤 은혜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15절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말씀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다는 것은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동거하며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성전은 천국에 있는 성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천국자체를 말합니다.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신다는 말씀은 구원받은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성막을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약시대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임재하셨듯이, 구원받은 성도들 가운데 가시적으로 임재하심을 뜻합니다. (요일3:2)
16절과 17절을 보면,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말씀합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교인들 중에 노예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잘 못 먹고 배고픈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목마름이 어떠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쉬지도 못하고 일하였고, 그 때 그들의 등에 무자비하게 내리 쬐는 태양빛이 얼마나 뜨거운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진실로 그들에게 있어 천국이란 배고픔을 채우고 갈증을 채우며 해의 뜨거움으로 더 이상 상하지 않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 세상의 주림과 목마름과 고통과 슬픔이 완전히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늘 영적 배고픔과 목마름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늘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수 샘이 되십니다.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시편 23편을 연상케 합니다. 이것은 곧 영원한 안식과 평화로운 천국의 삶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신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갖은 환난과 곤고함 속에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킨 성도를 향해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손으로 그 눈물을 닦아 주시며 위로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천국에서 완전한 기쁨과 은혜의 삶을 시작하는 전주곡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찬송가 가사가 있습니다.
오 주여, 내 영혼이 당신 안에서
그리고 오직 당신 안에서만
내가 찾던 평강과 기쁨을 찾았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기쁨일세
주님 밖에는 아무도 채우지 못하네
그 밖의 아무 이름도 필요 없네
거기엔 사랑과 생명과 영원한 기쁨이 있네
주 예수여, 그것이 주에게만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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