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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누가복음

누가복음 10장, 생명책

by 영구한도성 2022. 8. 16.
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17 七十 人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主여 主의 이름이면 鬼神들도 우리에게 降伏하더이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全蝎을 밟으며 怨讐의 모든 能力을 制馭할 權能을 주었으니 너희를 害칠 者가 決코 없으리라
20 그러나 鬼神들이 너희에게 降伏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記錄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17 ¶ And the seventy returned again with joy, saying, Lord, even the devils are subject unto us through thy name.
18 And he said unto them, I beheld Satan as lightning fall from heaven.
19 Behold, I give unto you power to tread on serpents and scorpions, and over all the power of the enemy: and nothing shall by any means hurt you.
20 Notwithstanding in this rejoice not, that the spirits are subject unto you; but rather rejoice, because your names are written in heaven.
 

 

요한계시록 13장 8절을 보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5절을 보면,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리라》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7절을 보면,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말씀합니다. (참조 - 17:8, 20:12)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말씀합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기록된 사람입니다. 반면 마지막에 우는 사람은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을 아무리 잘 살았다고 해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해도,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없다면 저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 세상을 힘들게 살았다고 해도, 특별한 업적이 없다고 해도, //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있다면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행복한 인생을 꿈꾸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축복 받은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행복과 축복은 다른 것입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면 행복합니다. 자녀들이 잘 되면 행복합니다. 가족들이 건강하고, 가정이 화목하면 행복합니다. 사회에서도 인정받고 출세하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행복하다고 해서 그것이 축복받은 인생은 아닙니다. 축복받은 인생은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된 인생입니다.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 가장 궁극적인 기쁨입니다.

 

우리가 가장 궁극적인 기쁨을 소망하며 산다면 이 세상에서 극복하지 못할 슬픔은 없습니다. 그것이 질병에 대한 것이든, 그것이 삶의 여러 환난에 대한 것이든, 극복하지 못할 슬픔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궁극적인 기쁨을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가장 궁극적인 기쁨을 소망하며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우리가 가장 궁극적인 기쁨을 소망하며 산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7절을 보면, ‘어린양의 생명책’ 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린양의 생명책’ 이라는 것은 그 생명책의 주인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이름을 생명책에 올리는 장본인이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만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이 어느 날 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사랑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어거스틴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나의 아들아,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그 때,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만을 원합니다. 주님 자신만을 원합니다."

 

진젠돌프 백작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 집안의 좋은 배경과 화려한 귀족 출신의 신분을 다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맨발로 거리를 향해 뛰쳐나갔습니다. 그 때 주님은 진젠돌프에게 묻습니다. "네 야망은 또 무엇이냐?" 그 때 그는, "내 야망은 다만 한 분, 그리스도 뿐" 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순수한 신앙이라는 것은 주님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신앙이라는 것은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이 성숙해 진다는 것은 주님만을 원하는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만을 원해야 하는 이유는, 그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 이름을 생명책에 올리는 장본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으로 주님만을 원한다면, 우리의 기도 역시 그 내용이 바뀝니다.

 

• “주님, 왜 나의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데려가셨나요?” 라는 질문이, “주님, 내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천국에 데려가셔서 감사합니다.” 로 바뀝니다.

• “주님, 왜 내게 이런 고난이 있는 건가요?” 라는 질문이, “주님, 이 고난의 끝에 주님의 상급이 있음을 믿습니다.” 로 바뀝니다.

• “주님, 왜 내게 이런 질병이 있는 건가요?” 라는 질문이, “주님, 이 질병 때문에 천국만을 사모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로 바뀝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들고 산다는 것은 생사(生死)에 대해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을 말합니다. 죽고 사는 것에 대해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8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 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새 생명을 얻는 것은 내가 죽어 미래에 경험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함께 과거에 죽었습니다. 우리는 미래에 죽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2,000년 전에 죽었던 사람입니다. 2000년 전에 땅에 묻혔던 사람들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 안에서 죽음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또다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2,000년 전에 이미 죽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새 생명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준다 해도 내가 얻은 새 생명, 하늘나라 생명과 바꾸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늘나라 생명책에 ‘내 이름’ 이 있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나 죽으나 예수님만 붙들고, 예수님만 의지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가장 궁극적인 기쁨을 소망하며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환난과 슬픔을 극복하며 사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법학자이며, 철학자인 ‘힐티(Carl Hilty)’ 라는 사람은 현대세계가 고난을 무서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면 고난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기 몇 시간 전에도 자기 마음에 기쁨이 있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을 보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말씀합니다.

십자가 처형을 눈앞에 둔 예수님에게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 기쁨이었고, 그 하나님의 뜻이 곧 완성된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완성하시며 기뻐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여섯 번째 말씀이, “다 이루었다” 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씀이 “아버지, 아버지의 손에 내 영혼을 맡깁니다.” 는 말씀입니다.

 

“다 이루었다.” 는 것은 원어로, '테텔레스타이'라고 합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헬라의 도시를 발굴해 냈을 때, 옛날의 세금 영수증을 발견해 냈는데, 거기에 바로 '테텔레스타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세금 지불이 다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으로부터 죄 값을 다 받으시고, 하나님의 장부에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지워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 값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알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환난과 슬픔의 상황에서도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다 이루었다.” 고 외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그 힘찬 외침 속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그 힘찬 외침 속에 넘어 질지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찬 외침 속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의 긍지와 만족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 곳에 함께 계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창에 찔리시는 피 묻은 고난의 현장에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는 그리스도의 아픈 상처를 함께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겪는 환난과 슬픔의 상황에 주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그 곳에 함께 계십니다. 나의 환난과 함께 하시고, 나의 슬픔과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는 나의 슬픔이 있고, 나의 환난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이 슬픔은 다 끝났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이 환난은 다 끝났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미 다 이루었다” 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날 동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죽는 그 순간 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가장 궁극적인 기쁨을 소망하며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의 기쁨을 초개(草芥)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초개는 지푸라기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기쁨을 지푸라기처럼 보잘 것 없고 하찮은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고난과 고통만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쁜 일이 있고, 즐거운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때 기뻐해야 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서 3장 4절을 보면,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다.” 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슬픈 일이 있을 때, 계속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반면 우리는 기쁜 일이 있어도, 그 일에만 머물러 있어도 안 됩니다. 슬픈 일은 궁극적인 기쁨을 소망하며 이겨내야 합니다. 기쁜 일에 대해서는 그 일에 머무르지 말고, 궁극적인 기쁨을 바라보며 더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보다 더 기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삶의 상황 속에 힘들기도 합니다. 좌절하기도 합니다. 회의를 느끼기도 합니다. 그 때 우리는 하늘나라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로 힘을 얻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들이나 딸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주님 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되,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아들이나 딸을 사랑하되,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이탈수업’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낮은 데 매였던 사랑이 높은 데로 옮겨가고 승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 보다 더 높은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들이나 딸을 사랑하는 것 보다 더 높은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하는 것 보다 더 높은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 아들이나 딸을 사랑하는 것,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땅에 속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늘에 속한 사랑입니다.

 

생명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생명에 머무르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나라 생명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늘나라 생명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하늘나라 생명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 이 땅에서의 삶도 영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잘 섬긴 어느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남편이 하루는 아내에게 결혼반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서 받은 결혼반지 안쪽에다 어떤 글을 새겨 넣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아내는 어떤 글을 새겨 넣었는지 궁금해서 좀 보여 달라고 말했지만, 남편은 적당한 때가 오면 보여 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남편은 늘 그 반지를 손에 끼고 있어서 아내는 반지에 새겨진 글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렀고,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은 어느 듯,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남편이 먼저 임종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살아온 이 노부부의 이별하는 장면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대로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이제는 반지를 빼어서 새겨진 글을 읽어보라고 말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의 차가워진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어, 새겨진 글을 읽어보니,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대를 이 땅에서 사랑하오. 하늘에서도 만납시다." 라는 글이었습니다.

 

이처럼 부부간의 사랑도 하늘나라 생명을 사모할 때, 이 땅에서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살 수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도 하늘나라 생명을 사모할 때, 그 직분을 영적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 생명을 사모할 때, 목회자는 참다운 목회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 생명을 사모할 때, 참다운 장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 생명을 사모할 때, 참다운 집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 생명을 사모할 때, 참다운 권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 생명을 사모할 때,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20절을 보면,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말씀하십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가 있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유의 은사가 있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도 수가 늘어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인정받는 목회자, 칭찬 받는 장로, 존경 받는 사회인이 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5장 24절을 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말씀합니다. 에녹이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과 동행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에녹 안에 계신 것입니까?

 

사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에녹 안에 계셨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 생명을 사모하고, 이 땅에서 영적으로 사는 것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단지 우리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늘 발견하고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