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사람들 feat. 아벨의 믿음, 에녹의 믿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겪는 기분 나쁜 일 중에 하나가 자신이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할 때입니다. 만일 세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두 사람만 서로 이야기 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면 그 사람은 그 자리를 떠나고 싶을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펼쳐 놓으신 하늘 아래서 살고, 하나님께서 깔아 놓으신 땅 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자연 환경 속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런 하나님을 ‘없는 하나님’ 으로 취급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분이 좋으시겠습니까? 기분 좋을 리가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없는 하나님’ 으로 취급한다면, 그것은 심판 받을 죄에 속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불신세상에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이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심한 구타를 당하면서 자란 사람은 하나님을 벌을 주시는 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 세상 아버지는 잔인하게 자식을 때리고, 심지어 흉기를 들고 위협하는 몹쓸 아버지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아버지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기도문 중에서 첫째 문장을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시작합니다. 여기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벌을 주는 아버지가 아니라, 상을 주시는 아버지십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외울 때 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를 때 마다, 내가 부르는 아버지가 상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은 학교에서 체벌이 많이 없어져서 매를 맞는 학생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체벌이 많았습니다. 특히 남학교는 아주 무서운 선생님 한두 분은 계셨습니다. 선생님 중에 야구방망이를 들고 때리는 선생님도 있었습니다. 당시 고등학교 교련시간에는 교련선생님이 M16 모형 소총으로 발등을 찍는 선생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선생님이 많은 학교는 학교 가기가 무섭습니다. 그런 학교 다니는 학생들의 기도제목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은 매를 맞지 않고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인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매를 드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인자하신 하나님, 상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여기서 ‘상’은 내가 잘 해서 받는 합당한 ‘보상’ 이 아닙니다. 여기서 ‘상’ 은 내가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받는 ‘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바로 내가 구원 받은 사실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상급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세상 삶이 다 끝나고,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영생복락을 누립니다.
무엇보다 가장 궁극적인 상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가장 큰 상급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상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가장 큰 상급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처럼 상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상급이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며, 살고 싶어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어떤 사람에게서 얻을 것이 있을 때, 그 사람을 가까이 하려고 합니다. 얻을 것이 없다면, 그 사람을 구지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최상의 상급이신 하나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상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삶 속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다는 것은 삶 속에서 항상 그 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삶 속에서 어떻게 그 분의 존재를 인정합니까? 생활 속에서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대해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이 그 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냥 일어나지 마십시오. 일어나면, ‘하나님! 저 일어났습니다.’ 고 하나님께 보고 드리십시오.
• 속상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 이 일로 제가 너무 속이 상합니다.’ 푸념도 해 보십시오.
•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면, ‘하나님,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십시오.’ 라고 간구해 보십시오.
• 저녁에 잠을 잘 때, ‘하나님, 저 이제 잡니다.’ 라고 말하시고, ‘꿈나라에서도 저를 지켜 주세요.’ 라고 기도드리십시오.
이러한 모든 것이, 생활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순간순간 상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죄악 중에 있을 때, 지금 하나님이 근심하고, 탄식하고 계실 것을 생각하며, 회개를 더 이상 미루지 마십시오. 회개를 더 이상 미루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 우리에게는 구원의 은혜가 더해 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합니다. 그 인격을 어느 정도까지 신뢰해야 합니까? 시편 9편 10절을 보면, 시편기자는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 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 하심이니이다.’ 노래합니다.
사람은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을 거절하고 버릴 수 있습니다. 보험계약을 위해서 고객을 찾아간다거나, 사업상의 일로 어떤 사람에게 부탁 할 일이 있거나, 급한 일이 있어서 어떤 사람에게 돈을 빌릴 일이 있다면, 그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거절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자기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아 간구하는 사람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의 간구를 들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해결해 달라고 보채는 그런 사람들을 기다리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이심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합니까?
첫째는, 선진들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선진들의 믿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1절 말씀입니다. 선진들은 바라는 것들에 대해서 실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실상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진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를 이미 믿음으로 받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며, 실존하시는 분이십니다. 선진들은 그 하나님에 대해서 실제로 존재하는 분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실제 삶에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음의 증거로 받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만난 경험들이 선진들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의 증거입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13절 말씀입니다. 13절 말씀을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여기서 믿음을 따라 죽은 사람들은 누구이며, 그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은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습니다. (7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8절)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는데, 그것은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절)
그들이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더 나은 본향, 하나님나라를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실존해 계시듯이, 하나님나라는 보이지 않지만, 실재 존재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이 하나나님나라가 보이지 않지만, 마치 보는 것처럼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옥에 가 보지 않았고, 천국에 가 보지 않았지만, 지옥이 있다는 성경 말씀, 천국이 있다는 성경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에, 우리는 지금, 더 나은 본향, 천국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아벨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4절을 보면, 아벨의 믿음에 대해서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4절 말씀을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창세기 4장 3절과 4절을 보면,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는데,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신 이유를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 희생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희생을 필요로 하는 양을 제물로 드린 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은 이유를 제물의 종류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이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입니다. 아벨은 양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당연하고,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제물의 종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과 그의 제물을 함께 받으셨음을 말씀합니다.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는 것은 아벨의 삶과 그의 제물을 함께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제물은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삶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삶을 먼저 받으셨기 때문에, 그 후에 드리는 아벨의 제물도 당연히 함께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 예물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물은 예물을 드리는 사람의 삶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예물을 드리는 사람의 삶이 믿음의 삶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예물을 받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우리가 드리는 이 예물이 믿음의 삶 속에서 드려지는 온전한 예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믿음의 삶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 방식으로 똑 같이 살면서 믿음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4장 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자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아마도 가인은 자기와 아벨이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판단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부당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포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에게는 믿음을 볼 수 있었지만, 가인에게는 믿음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들에게서, “집사님, 믿음이 참 좋습니다.” “권사님, 믿음이 아주 훌륭합니다.” “목사님, 장로님, 믿음이 대단히 강합니다.” 이런 말을 들어도 소용없습니다. 이런 말을 사람에게서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셔야 합니다.
4절 하반절을 보면, ‘아벨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말씀합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지금 이 시간까지, 지금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시간까지 하나님 앞에 남아 있는 것은 아벨의 믿음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런데 영원토록 하나님 앞에 남게 되는 것은 나의 육신이 아니라, 나의 믿음입니다.
셋째는, 에녹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5절에서 에녹의 믿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의 믿음은 죽음을 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에녹의 믿음을 기쁘게 여기셔서 그가 죽음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데려 가셨습니다.
에녹의 믿음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믿음입니까? 그것은 부활의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죽은 나사로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부활의 믿음이 있을 때, 진정으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사모할 수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 성을 사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더 나은 집, 더 좋은 집, 더 넓은 집을 사모하기 전에, 더 나은 본향, 하나님나라를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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