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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히브리서

히브리서 12장, 믿음의 주

by 영구한도성 2022. 9. 1.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許多한 證人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罪를 벗어 버리고 忍耐로써 우리 앞에 當한 競走를 하며
2 믿음의 主요 또 穩全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爲하여 十字架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介意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寶座 右便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疲困하여 落心하지 않기 爲하여 罪人들이 이같이 自己에게 拒逆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1 Wherefore seeing we also are compassed about with so great a cloud of witnesses, let us lay aside every weight, and the sin which doth so easily beset us, and let us run with patience the race that is set before us,
2 Looking unto Jesus the author and finisher of our faith; who for the joy that was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despising the shame, and is se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God.
3 For consider him that endured such contradiction of sinners against himself, lest ye be wearied and faint in your minds.

 히브리서 12장, 믿음의 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살면서 조금만 힘들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구원을 가볍게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구원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어떤 경우에도 구원을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구원은 천국을 얻는 것입니다. 천국은 에덴동산과 다릅니다. 에덴동산은 범죄 하지 않은 인간이 살 수 있는 낙원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한 사람이 살 수 있는 하나님나라입니다. 천국은 에덴동산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주님의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없지만, 천국에서는 주님의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단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동산이라는 공간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곳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 내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신비한 사건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런 곳이 천국입니다. 누구나 이런 천국을 소망한다면 이 세상을 살면서 조금 힘들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구원을 가볍게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된 것이 축복이고, 천국을 얻게 된 것이 축복인데, 또 하나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 수 있다는 사실자체가 축복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은혜요,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천국에 들어갈 때, 주님의 얼굴을 맞대고 보지만, 지금도 희미하게나마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살 수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언제 은혜가 떨어집니까? 주님을 바라보지 않을 때, 은혜가 떨어집니다. 자기를 바라보거나 세상을 바라볼 때, 은혜가 떨어집니다.

 

2절 말씀은 참으로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2절 말씀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는 연약하여서 온전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다가 어떤 사건을 만나면 낙심합니다. 무거운 인생의 짐 때문에 낙심합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 때문에 낙심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다가 다시 자기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다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연약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낙심합니다. 그러나 연약한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연약하다 해도 겨자씨 한 알 정도 크기는 됩니다.

 

겨자씨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제가 오래 전에 누가 겨자씨를 보여 주어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 성경책 위에 겨자씨를 올려놓고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까만색 표지에 겨자씨를 올려놓았는데, 저보고 겨자씨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눈을 아주 크게 뜨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겨자씨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못 찾겠다고 하니까, 그 사람이 겨자씨가 있는 위치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그것을, 성경책 위에 묻어 있는 먼지로 생각했지 겨자씨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겨자씨는 거의 미세한 먼지와 같이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미세한 먼지와 같은 믿음을 축복하셔서 온전케 하십니다.

 

미세한 먼지와 같은 믿음을 축복하셔서 그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본문에서는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믿음의 주’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 라는 말에서, ‘주’ 라는 것은 헬라어로 알케고스 (ajrchgov") 라고 합니다. ‘알케고스’ 라는 말은 ‘권세자’ ‘통치자’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믿음의 주’ 라는 것은 ‘믿음의 권세자’ ‘믿음의 통치자’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의 권세자이시고, 믿음의 통치자이시기에 주님께서는 연약한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믿음의 권세자, 믿음의 통치자로서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심어셨고,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붙드는 것이 소중합니다. 먼지 같은 믿음이라도 붙드는 것이 소중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 ‘주만 바라볼찌라’에서,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신다.’ 는 가사가 있지 않습니까?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주님이 어떤 주님이십니까? 낙심해서, 병이 들어서, 아니면 너무 힘이 빠져서, 도저히 주님을 바라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침상에서 힘겹게, ‘주님~~~’, 이렇게 주님의 이름만을 단순히 부르는 그 외마디 소리에도 응답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작은 신음소리라도 주님을 부르는 것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작은 신음소리에, 그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에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1절을 보면, 첫째로, 주님을 바라보기 위해 우리는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음을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의사 집안에서는 자녀가 의사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교사 집안에서는 자녀가 교사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업가 집안에서는 자녀가 사업가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정치인 집안에서는 자녀가 정치인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집안에서 그 동안 보고, 들은 것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사 집안에서는 병원얘기, 교사집안에서는 학교얘기, 사업가 집안에서는 돈 얘기, 정치인 집안에서는 정치얘기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분야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녀가 부모의 직업과 같은 직업을 이어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음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허다한 증인들의 믿음을 그대로 이어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 증인들이 모두 우리의 믿음의 가족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허다한 증인들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들이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살았듯이, 우리도 그처럼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들이 천국을 소망하며 살았듯이, 우리도 그처럼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역시 그 증인들의 한 사람이 되고, 나의 믿음을 나의 후손에게 물려 줄 수 있습니다.

 

둘째로, 주님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내 몸에서 그리고 내 심령 속에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은 거리끼는 모든 것입니다. 마음에 걸리는, 양심에 걸리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을 안고 주님을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양심에 걸리는 것을 안고 주님을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면, 이 사실을 숨기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정상적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고자 한다면, 우선 회개하고 그것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바라볼 수 있고, 주님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사람마다 습관적인 죄 문제가 있습니다. 유난히 약한 죄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얽매이기 쉬운 죄 문제입니다. 이런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도박중독에 걸린 사람은 도박을 버려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남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은 습관적인 그 죄의 습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늘 음탕한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은 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얽매이기 쉬운 죄 문제를 안고는 주님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왜... ... 당구에 빠진 사람은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면, 천장이 ‘당구다이’ 로 보이고, 동그란 무늬는 ‘당구공’ 으로 보이고, 일직선으로 그어진 선은 ‘당규큐대’ 로 보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눈에 늘 이런 것이 보이는데,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인터넷 바둑에 빠진 사람은 온 종일 인터넷 바둑만 생각하고, 스마트폰 카톡에 빠진 사람은 카톡만 생각합니다. 이런 상태라면 과연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이런 모든 것은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그러한 것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바둑을 두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카톡으로 문자를 주고받는 것도 죄가 아닙니다. 당구 치는 것도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에만 빠져 있는 것은 죄에 속합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에 빠진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이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건전한 것이라고 해도, 주님을 바라보는 데 방해가 된다면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셋째로, 주님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당한 경주라는 것은 불가항력적으로 우리 앞에 닥쳐진 경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싫든, 좋든 이 경주를 해야 합니다. 싫든 좋든 달려야 합니다.

 

경주를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달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이것은 ‘뒤로 후퇴하지 말고 앞으로 전진 하라.’ 는 말씀입니다. 빨리 달리든, 늦게 달리든 앞으로 전진 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뒤를 돌아보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출애굽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처럼, 앞에 홍해가 가로놓여 있어도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을 향해 가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경쟁은 빨리 달려서 결승점에 먼저 도착해야 승자가 됩니다.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1달, 2달 일찍 시장에 뛰어든 업체가 시장을 선점하였습니다. 그만큼 세상에서의 경쟁은 생각의 속도가 빛의 속도처럼 빨라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결승점은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도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늦게 달려도 결국 결승점에 도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달리다가 낙심하여 결승점에 도착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믿다가 낙심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결승점까지 완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인내입니다.

 

우리는 믿다가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과연 계실까? 의심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힘들어 세상으로 가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앞으로 향해 가고 있어야 합니다. 달리지 못하고, 걸을 수밖에 없다면 걷기라도 해야 합니다. 걸을 수 없다면 기어서라도 가야 합니다. 기어서 갈 수 없다면 굴러서라도 가야 합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앞을 향해 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한다는 것은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이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시선이 주님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고, 우리 심령이 주님을 바라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달리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있어야 합니다.

 

나의 발이 어디를 향하고 있어야 합니까? 예배의 자리로 달려야 합니다. 기도의 자리로 달려야 합니다. 섬김의 자리로 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눔의 자리로 달려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발은 그 현장으로 달리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관념이 아니라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기만 하고, 가만히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에, 그의 발은 구체적으로 고향과 친척과 어버지의 집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바라보는 것만큼, 우리의 발 역시 주님을 바라보고, 구체적인 현장으로 달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향해 달릴 때, 순간순간 수많은 시험을 당합니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는가? 편한 길도 있을 텐데.’ ‘대충 살다가 천국만 가면 되지 않는가?’ ‘교회 사람이 세상 사람보다 나은 것도 없는데, 내가 뭣 하러 교회에 다니고 있을까?’

 

그런데 이 모든 질문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스스로에게 던지는 수많은 변명에 불과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무엇을 명령합니까? 3절 말씀을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피곤한 걸로 따지자면, 낙심한 걸로 따지자면, 주님만큼 피곤한 상황,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겪은 사람은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적의 사건을 보고, 주님을 따랐지만, 나중에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는, 자기가 그렇게 사랑했던 제자들 까지도 모두 떠났습니다. 그 중에서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죽음의 순간까지 사람들의 배반을 경험하고, 사람들의 거역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모든 사람을 참으시고, 이러한 모든 일들을 참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신앙적인 변명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우리는 모든 사람을 참으시고, 모든 일들을 참으신 주님을 생각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주님을 생각하고, 이 주님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모든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따라가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12살 시절 그의 부모와 예루살렘에 갔었는데, 그의 부모는 예수님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사흘 후에 그의 부모는 아들 예수님을 성전에서 만났는데, 그 때, 12살의 어린 예수그리스도는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라고 그의 부모에게 묻습니다.

 

예수님은, 12살 어린 시절에도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되시고, 공생에 기간에도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하나님 우편에 계신 지금도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되십니다.

 

인생의 길은 되돌아오지 못하는 길입니다. 꼭 한번 밖에 갈 수 없는 일방통행의 길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방통행의 길로 가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길로 가야 합니다. 그 삶의 길은 유일한 생명의 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우리는 이 길을 따라서 가야 합니다.

 

이 길은 눈에 보이는 길이 아닙니다. 이 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 길은 믿음으로 가야 할 길입니다. 믿음으로 가는 이 길이 하나님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이 믿음의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종착역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아버지를 실제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입니까? 이 믿음의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종착역에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나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어떤 전도사님이 실제 있었던 사건 중에서 재미있는 얘기 하나를 저에게 해 주었습니다.

 

어떤 호기심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차를 몰고 가다가 고속도로에서 교통이 정체되어, 오랫동안 도로에서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호기심 많은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했는가 하면, 핸들사이로 내 머리가 과연 들어갈 수 있을까?없을까? 를 생각했습니다. 마냥 도로에서 기다리는 것 보다는 핸들사이로 머리가 들어갈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해 보니 핸들사이로 머리가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머리가 빠지지 않아서 119에서 긴급출동하여 핸들을 잘라내고 그 사람을 구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아주 단순한 호기심 하나를 별 의미 없는 것에 실천으로 옮겼던 사람입니다. ‘핸들사이로 머리가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 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가는 이 길은 생사를 가늠하는 길입니다.

 

이 믿음의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이 믿음의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무엇에 대한 것입니까? 이것은 단순한 영적 호기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소망이며,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 아버지를 만날 수도 있고, 못 만날 수도 있고,’ 가 아닙니다. 이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고,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만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