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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요한복음

요한복음 13장, 섬김

by 영구한도성 2022. 7. 21.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1 逾越節 前에 예수께서 自己가 世上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世上에 있는 自己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魔鬼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3 저녁 먹는 中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自己 손에 맡기신 것과 또 自己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手巾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弟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手巾으로 닦기를 始作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主여 主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對答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只今은 알지 못하나 이 後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絶對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對答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相關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主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沐浴한 者는 발밖에 씻을 必要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自己를 팔 者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後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行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先生이라 또는 主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主와 또는 先生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行한 것 같이 너희도 行하게 하려 하여 本을 보였노라
16 내가 眞實로 眞實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主人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者가 보낸 者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行하면 福이 있으리라
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擇한 者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者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聖經을 應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只今부터 일이 일어나기 前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20 내가 眞實로 眞實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者를 迎接하는 者는 나를 迎接하는 것이요 나를 迎接하는 者는 나를 보내신 이를 迎接하는 것이니라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구원사역을 완성하신 후에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르렀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아버지께로 부터 왔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집에 돌아가는 이유는 집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부터 와서 하실 일을 다 하신 후에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13절 하반절을 보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에는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되어 발생할 비탄스러운 일들에 대한 예언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되어 제자들의 배반을 당하게 됩니다. 당장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이 현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팔 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공회 앞에 서셨을 때, 수제자 베드로는 바깥 뜰에서 한 여종 앞에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고 3번 부인합니다.

 

앞으로 있을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이 자기를 버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기도도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기도하셨습니다. [눅23:34] 여기서 저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건과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 구원받는 것이지만, 주님의 사랑은 모든 이들이 회개하고 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도 사랑하셨습니다. 가룟유다가 멸망받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의 발도 씻겨 주셨습니다. 자기를 팔 자의 발을 씻겨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베드로의 발은 어떤 발입니까? 자기를 3번 부인하고 도망갈 발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시자마자 줄행랑을 칠 발입니다. 이 발을 모두 씻겨 주신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말씀은 변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13장8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동일하신 분이시므로 그 사랑도 변함없는 분이십니다.

 

가룟유다가 자기의 발을 씻겨 주신 예수님을 훗날 기억했다면 회개하고 돌아왔을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팔았지만 자기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을 기억했다면 다시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이 현장이 결코 잊을 수 없는 현장이었지만, 가룟유다에게는 곧 바로 잊혀진 현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이들은 가룟유다와는 달리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초대교회 역사를 맡기셨습니다.

 

비록 가룟유다는 멸망받지만, 가룟유다의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비록 그는 회개하지 않아서 멸망 받지만 예수님은 그의 발까지도 씻겨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어떤 죄인이든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예수님은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은 낮아지셔서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더러운 죄인의 발을 씻겨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은 엘로힘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뒤로 하고 낮아지셔서 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제자가 선생의 발을 씻겨 주고, 종이 주인을 발을 씻겨 주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이 제자의 발을 씻겨 주고, 주인이 종의 발을 씻겨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사회에서 납득할 수 없는 일을 하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 죄인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우리는 서로의 발을 씻겨 줌에 있어 지위고하를 따져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에서 가장 중책이라고 할 수 있는 목사와 장로는 섬김에 있어 가장 일선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도님이나 집사님이 섬김의 본을 보이는 것 보다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섬김의 본을 보이는 것이 더 큰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중직을 맡은 사람일수록 섬김의 본을 보이면 그 섬김의 은혜가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담임목사가 성도님들을 잘 대해 주고 섬기는 경우는 많습니다. 그러나 담임목사가 부교역자를 잘 대해 주고 섬기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예수님의 모습은 그러한 모든 생각을 타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가정이 모교회에 다니다가 교회를 옮겼습니다. 이유는 간단하였습니다. 서로가 높임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장로님, 집사님이라고 불러 주는 것 보다, 교수님, 회장님, 사장님이라고 불러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교수님, 회장님이라고 불리는 것보다 장로님, 집사님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영광된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 교회는 교수님, 회장님으로 불리기는 더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높임을 받고자 하는 것이 교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집사님일수록, 장로님일수록, 교역자일수록 그 자리는 섬김 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입니다. 교회에서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손을 걷어붙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데, 우리가 섬김을 받으려 한다면 과연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장차 제자들이 초대교회 역사를 섬길 때 서로가 섬김의 본을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디모데처럼 목회자이든, 스데반처럼 집사이든 서로는 섬기는 관계성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씀이 좋고 성령의 역사가 충만한 교회라 해도 사랑하고 섬기는 교회보다 더 은혜로울 수 없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처음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려는 예수님께 반기를 듭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상관이 없다는 의미는 너에게 분깃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분깃이 없다는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당황하여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말합니다. 이 말에 대해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의 발을 씻겨 주는 이 사건 속에는 구원에 관한 핵심적인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욕과 발 씻는 것을 분명히 구별하셨습니다.

 

발을 씻는다는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팔레스틴의 풍습으로는 사람들이 잔치에 가기 전에는 목욕을 했습니다. 그들은 초대하는 사람의 집에 갔을 때에는 다시 한 번 목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해야 할 일은 발을 씻는 일이었습니다. 발을 씻는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손님으로서 그 집에 들어가기 전에 행하는 하나의 의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욕한 자는 천국잔치에 초대 받아서 그 잔치에 가기 전에 이미 목욕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령세례를 통해 구원받은 자를 말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발 씻을 일만 남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목욕한 베드로에게 내가 너의 발을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세례를 통해 구원받은 베드로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지 않으면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목욕과 발을 씻는 것은 상호성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발을 씻는 것은 내가 구원받은 자라는 사실에 대하여 평소에 드리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에는 “내가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이 있고, “이런 나를 주님께서는 깨끗케 하십니다.” 라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발 씻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9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말씀합니다.

 

발 씻는 행위 자체가 없는 사람은 그가 목욕한 사실조차도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발 씻는 행위를 통해 이미 내가 목욕한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일예배 순서에 ‘참회의 기도’ 와 ‘사죄의 선언’ 이 있습니다. 같은 죄를 왜 늘 회개합니까? 이것은 자기의 의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 인 것을 고백하는 것이며,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발 씻는 행위는 구원에 대한 은혜가 큰 사람일수록 더욱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중요한 영적 진리를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줌으로써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는 섬김의 본이며, 또 하나는 구원의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서 제외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가룟유다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가슴 뭉클한 자리에서, 구원의 진리에 대해서 동영상 강의를 하시는 이 자리에서 가룟유다의 가슴은 너무도 차디찬 상태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머리 속에는 온통 예수님을 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언제 부터 예수님에 대해서 소원한 생각과 감정을 가졌는지는 모릅니다. 그가 생각하던 메시야가 아니었는지? 자기가 덜 사랑받는다는 생각 때문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8절 말씀에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는 시편 41편9절의 예언은 가룟유다의 불충을 한 마디로 기록한 것입니다.

 

동방사회의 문화적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공통적인 것인데, 어떤 사람과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우정의 표시이며 충실함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문화적 특징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굶어 죽는 사람은 잘 없습니다. 어떤 그룹에서 함께 식사를 하지 않더라도 더 멋진 식사를 할 수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어떤 그룹에서 식사를 하는데, 내가 만일 그 그룹에서 속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식사자리에서 제외되면 이것은 무척 섭섭한 일이 됩니다. 경우에 따라 우정이 깨어질 빌미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돈독함의 표시이며 일체감의 표시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식탁을 함께 한다는 의미인데, 만일 식탁을 함께 한 어떤 사람이 나를 배반하게 되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이것은 심히 통탄할 일입니다.

 

‘발꿈치를 들었다.’ 는 것은 헬라어로 ‘그는 발꿈치를 크게 했다.’ 를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발꿈치를 크게 했다.’ 는 것은 잔인한 횡포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즉 그동안 식탁의 자리를 함께 했던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은 잔인한 횡포라는 예언입니다.

 

보통 사람이 믿었던 사람에게서 이러한 잔인한 횡포를 당하면 분노를 억제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본문의 분위기를 보면 어떤 분노도, 어떤 노여움도 비치지 않습니다. 단지 슬픔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룟유다의 발을 씻기실 때 주님의 눈빛은 분노의 눈빛이 아니라 슬픔의 눈빛입니다. 이것은 잡히실 사건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가룟유다라는 사람의 인생에 대한 슬픔입니다. 멸망받을 한 인간에 대한 슬픔입니다.

 

이러한 슬픔어린 눈빛을 가지고 예수님을 가룟유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 이라는 말씀은 모든 비극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립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완전하고도 명확하게 받아들이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8절 말씀에서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는 말씀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류구원 역사를 위해 마련하신 환경입니다.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는 주님의 말씀은 이 환경의 희생자가 아니라 이 환경의 주인이심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역사에 대한 대가를 알고 계셨고, 그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그 날은 가룟유다를 포함해 악한 자들이 쳐 놓은 그물에 걸려든 것이 아닙니다. 그 환경은 주님께서 스스로 만드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미리 성경에 예언된 말씀을 발을 씻기시는 현장에서 하신 이유는 훗날 제자들이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합니다. 그러나 훗날 이들은 이 모든 것이 기록된 말씀에 따른 것을 알게 됩니다.

 

오순절날 이후 제자들이 초대교회 역사를 순교를 각오하고 섬길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예수님께서 성경에 기록된 메시야라는 믿음이 그 힘이었습니다. 그 믿음과 그 힘은 성령께서 주신 것입니다.

 

인류의 운명을 가늠하는 십자가 현장을 준비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입니다. 주와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행위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제자들을 가르치셨던 것을 하나로 정리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곧 섬김과 구원의 진리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준비를 하시면서 유언과도 같은 메시지를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초대교회 역사를 섬기면서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주님을 기억하며 다시 섬김의 자세로 돌아왔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