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결론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열매를 많이 맺으면 첫째,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열매를 많이 맺으면 둘째,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주님의 제자라는 것은 예수님 당시 12제자나 초대교회 당시 바울이나 바나바, 그리고 디모데 같은 사람만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라는 것은 열매를 맺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입니다. ‘열매’ 라는 것은 헬라어로 ‘칼포스’ 라고 하는데, 이것은 ‘결과, 결실’ 을 뜻합니다.
포도나무에 결과적으로 포도가 많이 붙어 있는 것이 좋겠습니까? 포도가 적게 붙어 있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리고 극상품 포도가 붙어있는 것이 좋겠습니까? 쓴 맛이 나는 포도가 붙어있는 것이 좋겠습니까? 당연히 극상품 포도가 많이 붙어 있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은 극상품 포도가 많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과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극상품 포도가 많이 붙어 있는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극상품 포도가 많이 붙어 있는 사람일수록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제자’ 라는 것은 ‘스승’ 을 따르고 배우는 사람을 뜻합니다. 주님의 제자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에게 있어 극상품 포도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와 관련된 열매가 맺혀 지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제자라는 것은 주님을 끝임 없이 따르고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8절에 “내 제자가 되리라.” 는 것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우리는 모두 지금도 주님을 배워야 하는 사람들이며, 주님 안에서 오늘 극상품 포도가 열리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극상품 포도가 열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5절 말씀을 보면, “너희는 가지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그리고 우리가 어떤 영적관계성으로 연결되어 있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가장 근본적인 관계성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에게 해당이 됩니다. 믿는 우리들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불신자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오직 믿는 이들에게 주님은 어떤 분이 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아버지는 농부이십니다. 믿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참포도나무요, 믿는 우리는 그 분의 가지입니다.
농부는 나무의 소유주이며 관리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교회의 주관자이시며,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키우시고 관리하시는 분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의 소유주이시며, 이 세상에 산재해 있는 교회들을 이끄시는 분이시며 대구영락교회의 관리자이십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 개개인에 대한 소유주이시며 관리자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것입니까? 그리스도와 연합한 교회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 하나의 가지이지만 이 가지들이 모두 참포도나무되신 예수님에게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까? 포도나무는 많지만 참포도나무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참포도나무는 영적존재인 인간에게 영적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나무입니다.
석가모니도 참포도나무가 될 수 없고, 공자도 참포도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철학이나 사상도 참포도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참포도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에게 영적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나무입니다.
민수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가나안에 정탐군을 보내도록 명령하십니다. 정탐군들이 돌아오는 길에 포도 한 송이 달린 가지를 베어서 가지고 오게 됩니다. [민수기 13장23절]
두 명의 남자가 막대기에 꿰어 메고 있는 큰 포도송이는 십자가 위의 구세주를 상징합니다. 즉 포도송이가 익어 마침내 포도주 틀에서 즙이 짜내어지듯이 구세주는 그 피를 우리를 위해 모두 흘리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3절과 34절을 보면 십자가에 못 박혀 이미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 한 군인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말씀합니다. 그리고 35절을 보면,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쏟으신 이 피와 물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모두 씻김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피와 물을 쏟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참포도나무가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의 피와 물을 공급받아 먹는 가지가 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주님의 피로 죄 씻음을 받은 모든 자입니다. 주님의 피로 죄 씻음을 받은 모든 자는 주님을 따라야 하고,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자는 특수한 몇 몇 부류의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자라는 영적정체성이 있는 모든 사람은 내가 주님의 제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젊은이로서 가는 제자의 삶이 있고, 중년기를 맞이한 사람의 제자의 삶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황혼기에도 제자의 삶은 있습니다. 지금까지 대구영락교회를 지탱하게 한 기도의 씨앗 중에 우리는 연로한 분들이 오랫동안 드린 기도의 씨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기도들이 이미 열매를 맺은 것도 있고 앞으로 열매를 맺을 것들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자의 삶은 천국 가는 그 날 까지 지속되는 것입니다.
2절에서 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고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 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실 때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가지뿐입니다.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와 열매를 맺는 가지입니다.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에 대해서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고 그것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3절을 보면,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 졌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깨끗하여 졌다.’ 는 말씀은 하나님의 선택적 구원을 의미합니다.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영적생명이 있는 사람에게는 열매를 기대할 수 있지만, 구원이 없어 하나님의 영적생명이 없는 사람에게는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열매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맺게 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물과 피로 깨끗하여 져서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인도의 간디는 흔히 가장 기독교적인 삶을 산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믿었던 사람은 아닙니다. 기독교적인 삶과 성령의 열매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오직 성령이 있는 사람에게서 비롯되는 열매입니다. 제자는 기독교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 졌으니.” 말씀하신 후, “내 안에 거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는 명령은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준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해 진 사람’ 에게만 해당됩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이미 깨끗해 진 사람은 가룟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고, 주님을 믿음으로 따른 사람들이 이미 깨끗해 진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주님께서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미 깨끗해진 사람이 주님 안에 거하라는 명령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영적 삶을 위한 의지적인 노력을 뜻하기 전에 참포도나무되신 예수님께 내가 가지로 붙어 있어 이미 하나님의 것이 된 상태를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한 교회로서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 된 것을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 는 명령을 하신 이유는 그들의 영은 이미 구원받았지만 그들의 육은 아직 죄악 된 세상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죄악 된 세상에 머물러 있어 세상 죄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내 안에 거하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삶을 다 살고 천국에 들어가서는 “내 안에 거하라.” 는 명령이 필요 없습니다. 그 곳에서는 세상 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살고 있는 지금 상태에서는 “내 안에 거하라.” 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4절 상반절을 보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말씀합니다.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의 운명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즉, “내 안에 거하라” 는 말씀은 내가 애처롭게 주님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늘 경험하고, 인식하며, 느끼며, 체험하며 고백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과는 운명공동체이므로 살아도 주와 함께 살고, 죽어도 주와 함께 죽습니다. 주와 함께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결국 주님으로 인해 살아납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는 주님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처롭게 매달리지 않습니다. 제자는 주님의 사랑을 압니다. 제자는 주님의 권능을 압니다. 그렇기에 제자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권능을 믿습니다. 이런 제자는 세상에서 승리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게 붙어 있는 근원적인 힘은 가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면,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절 31절과 3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겉으로 볼 때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처음에는 차이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심각합니다. 세상에 거하는 사람은 반드시 세상의 죄의 열매를 거두게 되고,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령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세상에서 죄의 열매는 그 마지막에 영벌이라는 열매를 거두고, 주님 안에서 성령의 열매는 그 마지막에 영생이라는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세상에서 죄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3장 18절을 보면,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땅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되어 버린 사람의 마음을 로마서에서 1장 29절에서 3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매일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사건·사고가 무엇입니까? 가시덤불이 되어버린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세상 살기가 왜 이렇게 힘든가? 라는 탄식이 왜 나옵니까? 이 세상이 가시나무가 되어 그것이 나를 찌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래도 세상에는 착한 사람이 있고, 아름다운 구석이 있다고 말합니다.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유복하게 생활하고 있는 사람은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1장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구석이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완전하게 타락한 곳, 소망을 찾을 수 없는 곳이 이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농부이신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이 가시덤불을 내게 되면서 절망적인 곳이 되었지만 농부이신 하나님은 포도농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참 포도나무 되시는 예수님을 하늘에 그냥 두지 않으시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가시덤불의 이 세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참포도나무 되신 예수님의 가지가 되게 하여 포도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에서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참포도나무 되신 예수님 안에 거할 때 맺게 되는 포도열매는 하늘에 속한 열매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몸은 이 세상에 있지만, 그는 하늘에 속한 열매를 맺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거하라.” 라 주님의 명령은 매일 매일, 순간순간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매일 매일, 순간순간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처음 주님을 믿을 때,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즉 구원의 영인 그리스도의 영을 선물로 받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충만함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것입니다. 제자의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성령충만함을 갈구하게 됩니다.
4절 말씀에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는 다른 나무와 다르게 잔가지들이 많이 솟아납니다. 이런 잔가지들을 그냥 내버려두면 포도나무의 양분과 수분이 분산되게 됩니다. 그래서 포도나무에서는 적당한 수형, 즉 나무형태를 만들기 위한 전정 작업이 필수적입니다. 즉 열매를 맺을 가지만 남겨놓고 다른 잔가지들을 과감히 잘라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그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즉 남겨놓아야 할 가지와 과감히 잘라야 할 가지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라는 사람이 "가지 않은 길" 이란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 시에서 프로스트는, 사람은 모든 일을 다 해볼 수 없고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곧 최선의 길을 제외하곤 과감히 잘라버려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 말씀으로 이미 깨끗하게 된 우리가 지속적으로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항상 선택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만 남겨 놓고 다른 잔가지는 잘라야 합니다. 그럴 때 기도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전도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한 선택의 결단을 내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되는가 하면, 영생이라는 과실을 볼 때까지 해야 합니다.
저는 대학교 학부시절까지만 해도 바둑을 좋아했고, 바둑 두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제 부친께서도 바둑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중학교 때 부터 대학교 때 까지는 1주일에 몇 번 씩 아버지와 바둑을 두었습니다. 인터넷이 보편화 되면서 인터넷 바둑이 생겼을 때는 인터넷으로 여러 사람과 바둑을 두었고 때로는 밤을 새워가며 바둑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둑을 두지 않은 지가 30년이 넘었습니다. 바둑 자체는 건전한 것입니다. 건전한 것이라고 해도 바둑으로 인한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잘라내야 할 가지는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삶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은 작은 가지 하나만 잘라내도 그는 어느 정도의 영적성장과 영적성숙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가지 2개를 잘라내면 그는 2배의 성장을 이룹니다.
7절을 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말씀합니다. 우리는 내 안에 주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의 말씀이 내 심령을 주장하시도록 맡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나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결국 내 안에 거하고 있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5절에서 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결론적으로 저와 여러분은 참포도나무 되시는 주님의 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 진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지에 포도열매가 맺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잔가지를 치는 작업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으로 하여금 극상품 포도를 재배하기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시고 잔가지를 치고 계십니다. 잔가지를 칠 때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극상품 포도를 재배하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신약성경 >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 15장, 내 안에 거하라 (0) | 2022.07.22 |
---|---|
요한복음 15장, 하나님의 소통 (0) | 2022.07.21 |
요한복음 14장, 그리스도의 평안 그리스도의 평화 (0) | 2022.07.21 |
요한복음 13장, 섬김 (0) | 2022.07.21 |
요한복음 12장, 밀알의 진리 (0) | 2022.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