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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요한복음

요한복음 17장, 대제사장적 기도

by 영구한도성 2022. 7. 22.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爲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爲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世上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榮光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穩全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世上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者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創世 前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榮光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願하옵나이다
25 義로우신 아버지여 世上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말씀은 20절에서 26절 까지만 읽었지만, 오늘 말씀은 17장 전체에 대한 말씀입니다. 17장 전체는 예수님의 기도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 중 가장 긴 기도가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로마서 8장 34절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 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공생애 기간을 보내시면서 늘 기도하셨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간구하고 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간구하고 계시는지 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지금 무엇을 간구하고 계시는 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 기간에 하신 기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을 통해 우리를 위한 간구의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기도임을 예수님 자신이 밝히고 있습니다. 20절을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당시 주님을 따르던 사람을 위한 기도이면서, 훗날 전도자의 발길을 통해 믿게 된 우리를 위한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내용을 살펴보기 전, 17장의 내용으로 기도하게 된 기도의 배경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3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본문 17장에서 말씀하는 기도를 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는 말씀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힘이 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제자들에게 근심을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과 함께 있는 한 환난을 겪지 않았고, 설사 환난을 겪더라도 주님께서 계시는 한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한다.”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앞으로 발생할 일들에 대해 암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앞으로 환난을 당해도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잡히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십니다. 제자들은 도망가고 흩어집니다. 나중에 부활의 주님을 목격하게 되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본격적인 사도행전 역사가 펼쳐집니다. 제자들 중 상당수는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제 떠나신다는 것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세상에서 너희는 환난을 당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지만 내가 세상을 이기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제 제자들 곁을 떠나시고 제자들이 이 세상에 홀로 있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을 위한 기도, 그리고 지금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위한 기도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하십니다.

 

첫째는, 이 세상에 남아있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래서 11절을 보면,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라고 기도하십니다.

 

둘째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24절을 보면,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가 하나님과 영광스러운 만남을 가지도록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남아있는 우리를 위해,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우리를 위해 요한복음 17장 전체에 걸쳐 이렇게 길게 기도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하면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사람 중에 이 세상을 떠난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눈으로 볼 때는 갑자기 이들이 이 세상을 떠난 것 같지만, 이들은 예수님의 간구의 기도 속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영광스러운 만남이 있게 해 달라는 간구의 기도 속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간구의 기도대로 하나님 아버지와의 영광스러운 만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3가지 측면에서 상실의 아픔을 가지고 산다고 합니다.

 

첫째는 시간에 대한 상실의 아픔, 둘째는 장소에 대한 상실의 아픔, 셋째는 ‘나 자신’ 에 대한 상실의 아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를 살펴보면 이러한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시간에 대한 상실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젊은 시절에 중년이나 노후를 준비하지 못했을 때 시간에 대한 상실의 아픔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노후를 준비한 사람도 시간에 대한 상실의 아픔은 마찬가지입니다. 머물고 싶은 나이, 청년시절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언제나 젊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에 사람은 시간에 대한 상실감을 느낍니다. 아무리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시간에 대한 상실감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얼굴엔 깊은 주름이 집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빨이 하나 둘 빠지면 자신감도 잃습니다. 전에 없던 질병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시간에 대한 상실의 아픔은 더욱 깊어져 갑니다.

 

오랜 시간 병석에 누워있는 사람도 시간에 대한 상실의 아픔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교도소에 복역하다가 출감한 사람에게도 시간에 대한 상실의 아픔이 있습니다. 행복했던 세월보다 고생했던 세월이 더 많았던 사람에게는 시간에 대한 상실의 아픔이 누구보다도 큽니다.

 

둘째는, 장소에 대한 상실의 아픔을 느끼며 사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사람들은 집이나 나만의 어떤 공간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힘들게 벌어서 가족의 보금자리를 마련했을 때, 큰 애착이 생깁니다. 그래서 새 집에 이사한 날부터 베란다, 유리, 가구를 닦고 또 닦습니다. 그 동안 공부방이 없다가 새 집에 이사하면서 나의 공부방을 가지게 되면 큰 감동을 받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사무실을 더 좋은 곳으로 얻게 되어도 애착을 갖습니다. 부동산을 구매해도 애착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버려두고 떠나는 순간 사람은 내가 그 동안 몸 담았던 장소에 대한 미련을 가지게 됩니다. 특히 사람은 오랫동안 애착을 가지고 살던 집을 떠날 때, 상실의 아픔이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기 암환자가 병원에서 마지막을 맞이하기 전에, 잠깐이나마 집에 돌아가서 집을 좀 둘러보고 싶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셋째는, 나 자신에 대한 상실의 아픔을 가진 이들을 위해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이 상실의 아픔은 가장 본질적인 상실의 아픔입니다. 이 아픔은 내가 어디로 부터 왔으며, 이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를 때 생기는 영혼의 아픔입니다.

 

물론 우리는 내가 하나님으로 부터 왔으며,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시간이 임박했을 때는 고민이 됩니다. 내가 어디로 부터 왔으며, 이제 어디로 가는지를 다시 질문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마음의 확신이 없을 경우 나 자신에 대한 상실의 아픔이 생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시간에 대한 상실의 아픔, 장소에 대한 상실의 아픔, 나 자신에 대한 상실의 아픔이 있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첫째는, 시간에 대한 상실의 아픔을 가진 우리를 위한 기도내용입니다.

 

24절 하반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시간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기도하십니다.

 

이 세상에서는 꽃다운 청춘이 지나갔지만, 병석에 누워있는 세월이 길었지만, 고생했던 세월이 많았지만 /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을 일시에 도말해 버리는 새로운 시간을 준비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꽃다운 청춘, 병석에 누워있었던 세월, 말로 다 하지 못할 이 세상에서의 고생의 세월들이 전혀 기억나지 않게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우리도 함께 있게 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그 영광을 우리도 보게 되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영원한 영광의 시간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서 25절을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말씀합니다.

 

화려한 인생이든, 소박하고 평범한 인생이든, 누추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이든 / 그 인생은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은 인생입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 결국은 마르고 결국은 떨어지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영광이 있는데 그 영광은 썩지 아니할 씨로 되는 부활의 영광입니다. 썩지 아니할 씨로 되는 부활의 영광은 마르거나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시간을 준비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영광에 들어갈 때 더 이상 시간에 대한 상실의 아픔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4절을 보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처음 시간이 다 지나간 뒤, 오게 된 그 나라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가고 영원한 영광 속에 거하도록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 예수님의 이 기도의 음성을 우리가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장소에 대한 상실의 아픔을 가진 우리를 위한 기도내용입니다.

 

24절 상반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장소를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 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계신 장소에 우리도 함께 있도록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장소에 대한 상실의 아픔을 가진 우리를 위해 새로운 장소를 준비하셨습니다. 그곳은 바로 예수님이 먼저 가서 계신 곳입니다.

 

요한복음 14장2절을 보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말씀합니다.

 

우리는 언제가 이 세상의 집을 떠나야 합니다. 정든 집을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새로운 집으로 가게 됩니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예비하신 하나님 아버지 집이며 새로운 거처입니다.

 

저는 제 아버지께서 위암으로 돌아가신 후, 며칠 되지 않아 제 아버지께서 살고 계시던 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제 장인, 장모님으로 부터 아버지 약제로 쓰라고 얻은 약초가 상당히 남아 있었습니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 부터 아버지께서는 입으로 음식물을 섭취할 수 없었습니다. 옆구리에 호스를 꽂아 바로 영양분을 투입하는 방식으로 연명해 가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약초를 거의 드시지 못하신 채 돌아가셨습니다.

 

살던 집을 보니 약초를 포함해서 이곳저곳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흔적들이 보였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그 집을 보면서 가슴 한 쪽으로 밀려들어 오는 상실감을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를 잃은 것에 대한 상실감이었고, 아버지가 없는 빈 집에 대한 상실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비하신 거처는 이별이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입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집은 빈 집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충만한 집이며,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찬송과 찬미로 충만한 집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집에서 영원토록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집도 버려두어야 합니다. 아무리 정든 집도 떠나보내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거처에서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몸이 살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 우리의 진정한 거처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집은 거할 곳이 많다.’ 고 합니다. 이 세상의 집은 거할 곳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자기 집이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전세나 월세 방을 전전하며 늘 이사 다녀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노숙자는 이런 전세나 월세 방 조차도 없습니다. 하늘 아래 내가 묵을 장소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 만큼 슬픈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은 거할 곳이 많다.’ 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집 없는 서러움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 아버지의 집은 영원한 내 집이 됩니다. 세상의 집에서는 살다가도 주인이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는 나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자녀에게 영원토록 살도록 주어진 영원한 내 집입니다.

 

지금, 장소에 대한 상실의 아픔이 있거나, 장차 장소에 대한 상실의 아픔을 겪게 될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지금도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있어” 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자신은 여관에 있을 곳이 없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채 태어났지만, 당신의 자녀들에게는 영원한 거처를 약속하셨습니다. (눅2:7) 우리가 이 기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나 자신’ 에 대한 상실의 아픔을 가진 우리를 위한 기도내용입니다.

 

요한복음 17장 전면에 흐르는 예수님의 기도 내용은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모르는 사람들, 곧 존재에 대한 상실의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들을 위한 기도 내용이 어떠합니까? 2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 이라고 말씀합니다. 6절을 보면,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다.’ 고 말씀합니다. 10절은 보면,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다.’ 말씀합니다. 24절을 보면, ‘내게 주신 자’ 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더 이상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모르는 상실의 아픔’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면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의 영광과 함께 하고, 주님과 함께 살며, 주님께 있는 모든 것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21절을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 부모가 누구인지를 모를 때 방황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가 없고, 자기 출생에 대해 잘 모르는 어떤 사람은 자기 부모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부모를 알아야 자기 근본을 알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내 영혼의 근본을 모르면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영혼의 근본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누구나 하나님 아버지를 만날 때 그 영혼의 방황이 끝납니다.

 

예수님의 기도처럼,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우리도 다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안에 있게 된다는 것을 알 때 그 영혼의 방황이 끝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시간에 대한 상실의 아픔, 장소에 대한 상실의 아픔, 존재에 대한 상실의 아픔을 가진 이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모든 이들을 위한 기도는 아닙니다. 택한 백성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에는 그 기도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지만, 죄로 오염된 세상은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9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기도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는 택한 백성입니다. 택한 백성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입니다. 주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기도 대상입니다.

 

15절 말씀을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지금 당장 세상에서 데려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세상에서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택한 백성들의 삶을 정의하면,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되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을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말씀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남아있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되기를’ 기도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되고, 그 영광에 들어갈 것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지금도 이렇게 기도하고 계시는 주님을 묵상하면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임을 기억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하늘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