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자의 섬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도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하는 몇 가지 얘기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약한 사람들이나 교회에 다닌다는 얘기를 합니다. 또 원래 강한 사람도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 나약해 진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약함을 미덕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상한 갈대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힘에도 쉽게 꺾이지 않는 거목(巨木)과 같은 나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 믿으면 상한 갈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크고 튼튼한 거목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꺼져 가는 등불처럼 나약한 사람이 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바람에도 쉽게 꺼지지 않는 횃불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1절을 보면, ‘믿음이 강한 우리는’ 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강한’ 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뒤나토스’ 라고 하는데, ‘능력이 있는, 할 수 있는’ 이라는 의미와 ‘세력에 있어 막강한, 뛰어난’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세력에 있어 막강한 사람이고, 뛰어난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믿는 주님은 가장 뛰어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가장 막강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 약해 질 때 마다, “내가 믿는 주님은 가장 뛰어난 분이시다.” 외쳐야 합니다. “내가 믿는 주님은 가장 막강한 분이시다.” 외쳐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믿음이 강해 져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불굴의 의지로 성공을 거둔 사람을 강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돈이 많고 권세가 있는 사람을 강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믿음이 강한 사람을 ‘강한 사람’ 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들 중에는 건강이 약한 분도 계십니다. 생활이 어려운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건강이 약하고, 생활이 어렵다고 해서 믿음까지 약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려운 상황일수록 믿음은 더 강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강하다’ 는 것은 ‘믿음이 건강하다’ 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강하다’ 고 할 때,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령의 열매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강한 믿음’ 에는 그리스도의 인격이 묻어 있습니다. ‘강한 믿음’ 에는 성령의 열매가 맺혀 집니다. 그래서 ‘강한 믿음’ 은 자기를 살릴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립니다. 만일 나의 믿음이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라면 잘못된 믿음입니다. ‘건강한 믿음’ ‘강한 믿음’ 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믿음입니다.
세상권세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권세입니다. 때로는 그 권세로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권세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권세입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는 권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에 하나님 아들로서의 권세를 어떻게 사용하셨습니까?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섬기는데 사용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으로 부터 받은 영적권세로 사람을 섬기고,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의 강함은 약한 사람일수록 보호하고, 약한 사람일수록 그를 섬기는 데 있습니다.
인터넷에 떠들썩한 말 들 중에 하나가, ‘갑질사회’ ‘갑질횡포’ 라는 말입니다. 승무원을 위협하고 다그쳐서 항공기를 되돌리게 한 항공 회사 임원, 백화점 주차 요원의 무릎을 꿇리고 폭언을 퍼부은 모녀, ... 이런 사람들의 갑질횡포는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갑질횡포’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갑’ 의 횡포가 심해질수록 이 사회는 살기 어려운 사회, 삭막한 사회가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병든 사람들을 섬기는 교회,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는 교회,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될 때, 비로소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목사님, 전도사님들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믿음으로 목회를 해야 합니다.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으로서 직분을 감당할 때도 다른 사람을 섬기는 믿음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을 참으로 섬기기 위해서는 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1절과 2절을 보면,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믿음이 강한 사람만이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만이 이웃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만이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눈물도 배가 불러야 난다.” 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란 무릇 자신에게 여유가 있어야 남을 동정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자기 믿음 하나 지키기도 힘이 듭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동정할 마음을 가진다거나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여유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강한 사람은 삶 속에서 영적인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돌아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여유를 가집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달리 말해서 믿음의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믿음의 재산이 많아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재산이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영적 여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재산이 많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에 대해 가지는 성령의 마음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마태복음 5장 7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합니다.
“긍휼” 이란, 불쌍히 여기며 동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긍휼히 여겨야 할 대상에는 그 자격을 보지 않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긍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긍휼의 대상이 됩니다.
사람은 보통 자기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서 어떤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동정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상대방이 나보다 못하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며 동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나와 처지가 같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며 동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특별히 나와 가깝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며 동정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긍휼히 여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정치지도자는 권세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안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지도자를 긍휼히 여기고 바른 정치를 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재벌회장은 경제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안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정당하게 돈을 벌고, 공익을 위해 쓸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원수를 긍휼히 여길 줄 알아야 하고, 죄를 범한 사람에 대해서도 긍휼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 믿음의 재산이 많은 사람은 이처럼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겨야 하는 대상은 나에게 잘해 주었던 적이 있거나, 나의 필요를 채워준 적이 있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나에게 잘해 주었던 적이 있거나, 나의 필요를 채워준 적이 있었던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단지 내가 대접 받았기에 상대방을 대접하는 인간세상의 황금률입니다.
긍휼의 대상은 그 반대입니다. 설사 나에게 잘해 준 적이 없고,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도 긍휼의 대상입니다. 나의 원수도 긍휼의 대상입니다. 예수님께 있어서는 자신을 팔았던 가룟유다, 자신을 배반하고 도망을 했던 제자들, 자신을 재판에 회부했던 사람들, 그리고 고문을 가하고 조롱을 했던 군병들까지 긍휼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누가복음23장34절)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려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커서도 사랑을 줄줄 모른다.” 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책임 중 하나가 자녀에게 사랑을 듬뿍 쏟아 붓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긍휼에 대한 체험이 큰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길 줄 압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긍휼에 대한 체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단지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 것은 주님의 긍휼에 대해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긍휼에 대한 체험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성령의 씨앗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주님의 긍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용서가 있기 때문에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내가 알던 모르던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어떤 사람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매우 의도적으로, 또는 치밀하게 사람을 괴롭혔던 적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재까지 살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주님의 긍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서로서로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긍휼히 여기고, 아내는 남편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성도들 상호간에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목사님, 전도사님들은 성도님들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성도님들도 목사님, 전도사님들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긍휼히 여겨야 하고, 환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겨야 하며,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야고보서 2장13절에서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말씀합니다. 사람을 계산적으로 대하면 긍휼을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유일한 이유는, 주님께서 먼저 나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육체는 서로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몸이 따라 주듯이, 먼저 행동으로 사람을 긍휼히 여길 때 마음에서도 긍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민족은 육체와 영혼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시편에서 “내 영혼이 여호와를 찬양한다.” 고 할 때, 원어성경에서는 그 영혼이 때로 심장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심장이 곧 영혼이며, 영혼이 곧 심장인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심장이 냉랭한 사람은 그 영혼까지 냉랭합니다. 심장이 뜨거운 사람은 그 영혼도 뜨겁습니다. 우리는 내 심장과 내 영혼이 성령 안에서 뜨거워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 눈물이 울컥 쏟아지는 긍휼함이 우리에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를 해롭게 한 사람에 대한 복수심보다 그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람이 사람 때문에 고통당하는 이유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단지 내가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에 고통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 주님으로 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축복이 있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도 긍휼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 결국은 구원에 이르는 복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긍휼이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20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삶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삶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삶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사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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