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장, 마귀의 속성
본문을 보면, 거라사 지방에 사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귀신 들려 있었습니다. 귀신 들린 이 사람의 인생은 한 마디로 완전히 망가진 인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탄의 결박으로 완전히 망가진 인생을 살리십니다.
결론적인 말씀은 15절 말씀입니다. 15절 말씀을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첫째로, 마귀는 사람을 죽음의 자리로 내 몰지만, 주님은 우리를 생명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2절을 보면, 그는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정상적인 사회생활도 할 수 없었습니다. 무덤이 어떤 곳입니까? 죽은 사람의 시체가 있는 곳입니다. 이처럼 마귀는 사람을 정상적인 생활에서 벗어나게 하여, 죽음의 자리로 내 몰고자 합니다.
오래 전의 사건입니다. 울산시 남구 신정동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장모씨(45)가 불을 질러 자신은 그 자리에서 숨지고, 출동한 경찰관 2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울산 남부경찰서는 “식당 주인 A 씨(55)가 ‘애인 관계인 남자가 행패를 부린다’ 며 신고했다” 고 설명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식당 주인과 불을 지른 장모씨 사이에 있었던 갈등관계가 이 사건의 배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현장에 출동한 신 모 경사 등 2명의 경찰관은 휘발유가 든 플라스틱병을 앞에 두고, 라이터를 들고 있는 장 씨를 발견하고, "라이터를 내려 놓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장 씨는 경찰의 만류에도 플라스틱병에 불을 붙인 뒤 식당에 던졌습니다. 장 씨는 현장에서 숨졌고, 경찰 2명은 2~3도 화상 등 중경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네티즌들은 여러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중에서 어떤 사람은, “내연관계, 불륜이 무서운거야” 라는 반응도 보였습니다.
겉으로 보면, 불륜관계에서 시작한 갈등입니다. 그리고 장씨는 무슨 일인지 모르지남, 화를 참지 못해 불을 지른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배경에는 사탄의 역사가 있습니다. 사탄이 장씨로 하여금 화를 참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사탄이 장씨로 하여금, 불을 지르게 만든 것입니다. 이처럼, 마귀는 사람을 격동시켜서 죽음의 자리로 몰아갑니다.
본문에서, 귀신 들린 거라사 광인이 예수님으로부터 고침 받지 못했다면, 그는 다른 사람을 죽였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고침 받지 못했다면, 자살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그를 고치십니다.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마귀의 결박에서 풀어주십니다. 그를 살리십니다. 생명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15절 말씀처럼, 귀신들린 자는 예수님으로 인해, 정신이 온전해 집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마귀의 결박으로 피폐해진 영혼을 구원해야 합니다. 생명의 자리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미친 사람을 정신이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능력은 구체적인 현장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할 때, 주의 말씀의 권세로 귀신이 쫓겨나야 합니다. 장로님이 환우들을 위해 안수 할 때, 병고침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권사님이, 그리고 집사님이 합심기도하며,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교회를 덮고 있는 모든 어둠의 권세가 물러가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님들이 합심하여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온 교회가 성령의 불길로 뜨거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교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입니다. 마가복음 9장 2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 주시면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 고 말씀하십니다. 주되심교회도 기도의 불길로 뜨거워진다면, 합심해서 기도한다면, 어떤 사탄의 역사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마귀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러운 곳으로 내 몰지만, 주님은 우리를 정결한 장소로 인도합니다.
2절을 보면, 그냥, ‘귀신’ 이라고 말하지 않고, ‘더러운 귀신’ 이라고 말합니다. 귀신의 속성은 더럽고, 더러운 것을 좋아합니다. 시체가 있는 무덤을 안방처럼 사용하는 것도 더러운 귀신의 속성 때문입니다. 귀신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는 것도 더러운 귀신의 속성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옷을 벗고 지낸 것도, 더러운 귀신의 속성 때문입니다.
그리고 귀신은 세상의 온갖 추하고, 음란하고 엽기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생각과 마음을 사람에게 심어서, 추하고, 음란하고, 엽기적인 사람으로 만듭니다.
포르노 문화는 지금 온 세계를 뒤 덮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의 정신세계든, 젊은이의 정신세계든, 나이 든 사람의 정신세계든, 포르노 문화가 뒤 덮고 있습니다. 포르노 문화는 정상적인 사람이 만드는 문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탄이 만들어 내는 더러운 문화입니다.
추하고, 음란하고, 엽기적인 것만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속여서 이득을 취하는 것도 더러운 마음입니다. 자기만 잘 되면 좋다는 생각으로 온갖 불의를 행하는 것도 더러운 마음입니다.
이처럼 마귀는 더러운 귀신이며, 자기의 더러움을 사람의 영혼 깊이 심고, 뿌리를 내리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귀의 역사로 더럽혀진 영혼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정결하게 하십니다.
이사야 1장 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이 예언의 말씀은 지금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더러운 귀신은 이 세상을 온갖 더러운 죄악으로 뒤 덮고 있지만, 그 속에서도 주님은 주님을 믿는 모든 이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하십니다. 정결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죄의 속성이 무엇인가?’ 를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고상한 죄는 없습니다. 나름대로 봐 줄만한 죄도 없습니다. 어떤 죄든지 ‘죄’ 라는 것은 그 속성상 더럽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우리는 어떤 죄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말씀합니다.
자백은 하나님과 관계성을 맺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기도 중에서, 하나님께 자백하는 기도를 많이 드려야 합니다.
• 내가 어떤 사람에게 욕설을 했다면, 욕설을 했다고 하나님께 자백하십시오.
• 내가 음욕을 품었다면, 음욕을 품었다고 하나님께 자백하십시오.
• 내가 하나님을 불신했다면, 불신에 빠졌다고 하나님께 자백하십시오.
• 내가 정직하게 행하지 못했다면, 정직하지 못한 것을 하나님께 자백하십시오.
• 내가 어떤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자백하십시오.
• 내가 진실한 마음으로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고, 성도를 사랑하지 못했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자백하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허물과 죄에 대해서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에 대해서 민감하다면, 그것이 고상한 죄도 아니고, 봐 줄만한 죄도 아니고, 단지 더러운 죄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에 대해서 자백해야 할 것을 발견하고, 그리고, 실제 우리의 허물과 죄에 대해서 자백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좋아집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죄와 불의를 미워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허물과 죄에 대해서 숨기지 말고, 자백해야 합니다.
셋째로, 마귀는 사람들의 영혼을 혼란하게 하지만, 주님은 우리 영혼을 평화롭게 합니다.
영적으로 볼 때, 더러운 것은 무질서와 관련 있고, 정결한 것은 질서와 관련 있습니다.
그래서 더러운 것은 사람의 정신세계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무질서하게 만듭니다.
더러운 귀신이 들어갔을 때, 거라사 지방의 이 사람은 정신적으로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혼란에 빠지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모릅니다. 무엇이 해야 할 일이고, 무엇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인지를 모릅니다. 혼란에 빠지면, 자기가 있어야 할 장소가 어디인지도 모릅니다. 혼란에 빠져서 사람이 미쳐 버리면, 자기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미쳐 버리면, 자기가 어른인지, 어린아이인지도 모릅니다.
거라사 광인은 완전히 미쳐 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있어서는 안 될 장소, 무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5절을 보면,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다녔습니다. 자기가 헐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나는 헐크다’ 소리 지르며 다녔을 것입니다. 자기가 수퍼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나는 수퍼맨이다.’ 소리 지르며 다녔을 것입니다.
그리고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습니다. 자기 몸이 아프다는 것을 느끼면, 몸을 해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몸이 아프다는 것도 모르고, 피가 나고, 상처가 난다는 것도 모르고, 끊임없이 날카로운 돌로 자기 몸을 해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옷을 벗고 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들어가니 부끄러운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거라사 광인을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질서한 그의 정신세계에 질서가 잡혔다는 것입니다. 혼란한 그의 영혼과 혼란한 그의 마음이 안정되었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마음의 안정은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커피숍에서 찾을 수도 있습니다. 잠시 동안의 마음의 안정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수면을 취하는 잠자리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영혼의 궁극적인 안정과 질서는 예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현대인들 중에는 너무나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서 갑자기 죽는 경우도 많습니다. (突然死,돌연사)
교회는 그러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려 주어야 합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료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참으로 오고 싶은 교회가 됩니다.
어떤 교회는 평일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이다가, 주일에만 모이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오고 싶은 교회가 되면, 평일에도 사람들이 붐비게 됩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성전에 온다는 것 자체가 영적인 즐거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마귀는 떼 귀신으로 사람을 점령할지라도, 주님은 하나님의 권세로 그 떼 귀신을 물리치십니다.
9절에서, 예수님이 귀신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고 묻자, 귀신은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말합니다.
군대란 헬라어로 ‘레기온’ 이라고 하는데, 군단을 말합니다. 당시 로마의 한 군단은 약 육 천 명이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1개 군단의 귀신이 들어가 있었다면, 그 사람에게는 육천 마리의 떼 귀신이 들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떼 귀신이 들어가 있으니 귀신 들린 사람은 힘이 장사였습니다. 4절을 보면,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릴 정도로 힘이 장사였습니다.
군대에서 아주 괴팍한 상관 한 명이 나를 주관해도 엄청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런데 떼 귀신에게서, 엄청난 힘의 지배를 받았던 그 사람은, 말할 수 없는 압박에 시달리고, 그 영혼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떼 귀신, 마귀도 예수님을 보자, 굴복합니다. 수많은 귀신들이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을 당해 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숫자가 많을지라도 귀신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감히 예수님과 싸울 생각을 못합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 단지 부탁합니다. 10절을 보면,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합니다. 11절과 12절을 보면,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있는 자리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돼지 떼에게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허락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더러운 군대 귀신은 돼지 떼에게 들어갑니다.
13절을 보면,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갔을 때,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더러운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니 그 돼지들도 미쳐서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모두 죽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몰사당한 돼지 떼를 보면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거라사 광인도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돼지 떼가 죽었던 것처럼,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만큼 마귀의 세력은 강합니다. 그렇지만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는 ‘새 발에 피’ 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많은 군대 귀신이라 해도,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합니다.
손자병법에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 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험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적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면, 단 한 번 싸워도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영적 세계에도 이 사실은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사탄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나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힘으로는 사탄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탄을 이길 수 있는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아야 합니다. 그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 권세입니다.
에스겔 28장 12절을 보면, 사탄은 모든 천군 천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해서,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말씀합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그의 이름은 ‘아침의 아들, 곧 계명성’ 이었습니다. 이것은 타락하기 전, 천국에서 그의 계급을 상징합니다. (사14:12) 계명성은 하나님의 천국 보좌를 지키는 거룩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겔28:14)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계명성을 모든 방면에서, 이를 테면, 지혜와 아름다움과 능력에 있어서 월등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천국 보좌를 지키는 거룩한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계명성이 하나님 곁을 떠나 타락하면서 사탄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뛰어난 존재로 지음 받은 사탄을 우리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 권세를 의지하면, 어떤 사탄의 권세도 이길 수 있습니다.
사탄이 가진 최고의 권세는 죄와 사망권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죄와 사망권세를 깨뜨리심으로 사탄을 멸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사탄의 팔, 다리를 모두 잘라 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사탄의 결박 속에 있는 이들을 풀어주셨습니다. 죄와 사망권세는 하늘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권세였는데, 이 권세가 멸망당하면서, 사탄과 그의 사자들은 땅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이 땅에서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가 되면, 사탄과 그의 사자들은 이 땅에서도 쫓겨납니다. 이미 하늘에서는 쫓겨났습니다. 앞으로 이 땅에서도 쫓겨납니다. 쫓겨나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불과 유황에 갇히게 되어 더 이상 활동을 못하게 됩니다. 이미 사탄의 팔, 다리를 잘라내신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불과 유황이 타는 곳에 사탄의 머리를 가두어 두셔서 영원한 심판을 당하게 하십니다.
사탄과 그의 사자들의 마지막 운명을 요한계시록 20장 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사탄과 그의 사자들의 마지막 운명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져서 영원토록 고통 받는 것입니다. 사탄과 그의 사자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운명을 알고 있습니다. 땅에서 마지막 발악을 하다가, 결국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게 될 것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 앞에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첫째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승리하신 주님을 믿고,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의 미혹을 물리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의 미혹을 물리치는 유일한 무기는 이미 승리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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