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장 18절-25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 대해 3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18절을 보면,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나심이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른 것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이전의 사람이나 예수님 이후의 어떤 사람도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석가모니도 성령으로 잉태되지 않았고, 마호메트도 성령으로 잉태되지 않았고, 여러 이단이나 사이비 교주들도 성령으로 잉태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 함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계의 4대 성인 중 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처럼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계의 4대 성인 중 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사도신경을 보면,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세 가지 단계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자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자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에는 나의 존재에 관한 실존적 고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나’ 란 존재는 이 세상에 우연히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 란 존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고, ‘나’ 란 존재는 성자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또한 성자하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데, ‘나’ 란 존재는 바로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 의 출생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고, ‘나’ 의 삶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고, ‘나’ 의 죽음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 ‘나’ 란 존재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12장1절과 2절을 보면,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영적고향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 1장26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합니다.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킬 때, ‘나’ 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우리’ 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태초의 사람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예레미야 1장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다시 말해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은 모태에서 지금도 창조의 역사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생긴 것은 우연히 이렇게 생긴 것이 아니라 모태에서 창조역사를 하신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18절 말씀에서 성령으로 잉태된 것은 곧 성자하나님인데, 이 성자하나님은 이미 사람을 만드실 때 그 창조역사에 개입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성자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창조역사에 개입하셨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47절과 48절을 보면,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입고 오셨지만, 전능한 하나님으로서 나다나엘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의 어리석음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보이는 사람 앞에서 산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사람은 나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우리는 나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28절 말씀을 보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고 말씀합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역사의 한 획을 긋는 큰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획을 그은 사건은 하나님의 아들이 동정녀의 몸을 통해 이 세상에 오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이 인류역사를 A.D와 B.C로 나누는 분기점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인류역사의 분기점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 인생의 분기점이 되십니다. 내 영혼의 구원에 관한 분기점이 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18절을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멸망과 구원에 관한 분기점이 됩니다.
예수님의 나심에 대한 두 번째 말씀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오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21절 말씀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 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에베소서 1장4절과 5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라고 합니다. 이처럼 ‘자기 백성’ 이라는 것은 ‘창세 전에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여 택한 백성’ 을 말합니다.
또한 ‘자기 백성’ 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주님의 오른 편에 있게 될 ‘양’ 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5장 33절과 34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 곧 창세 전에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여 택한 백성 곧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11절을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염소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분이 아니라 오직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분이십니다.
영적으로 보면, 인류역사는 구원받기로 예정된 백성들이 하나님나라에 다 찰 때 까지 진행되는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15장4절을 보면,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인류역사는 주님께서 잃은 양을 다 찾게 되면 끝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각기 자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대대손손 유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소망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인류역사는 주님께서 잃은 양을 다 찾게 되면 끝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끝이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고 우리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 끝이 100년 후 일 수도 있고, 1,000년 후 일 수도 있지만, 오늘일 수도 있고, 내일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구원은 잃은 양을 찾아다니시는 주님의 영적여정 속에서 이루어 진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17절을 보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우연히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을 때 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열심히 찾아다니는 주님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입니다. 로마서 3장9절에서 1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람들, 어른이나 아이나, 노인이나 갓난아기나, 남자든 여자든 모두 죄 아래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누구보다 더 죄인이고, 덜 죄인이고, 그런 것이 없습니다. 똑 같은 죄인입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살인한 사람을 마음으로만 살인한 사람보다 더 큰 죄인으로 여기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은 똑 같은 죄인으로 취급하십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간음을 한 사람을 마음으로만 간음한 사람보다 더 큰 죄인으로 여기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은 똑 같은 죄인으로 취급하십니다.
그런데 죄인의 운명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6장23절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육체의 죽음을 당하는 것만이 사망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장27절 말씀을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21장8절을 보면, 그 후에 있는 심판이라는 것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는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둘째 사망은 영원토록 고통당하는 사망입니다. 마가복음 9장48절을 보면, 둘째 사망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영원한 사망을 당할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심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4절에서 6절을 보면,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실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만이 자기백성의 죄를 대신 지실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의 죄를 대신 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이되 죄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죄 없는 사람은 한 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 하신 예수그리스도 뿐이십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5장22절에서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 대한 마지막 말씀은 그 분의 이름에 대해서입니다. 23절 말씀을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을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뜻입니다.
이 예언은 유다왕 아하스가 북왕국과 아람의 동맹군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으로 떨고 있을 때 이사야를 통해 주어졌던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예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 ‘스스로 계신 자’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 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초월자로 계신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오셨습니다. 사람과 같은 육체를 입으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뜻은 ‘하나님이 육체를 입으시고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사람들은 흔히 “당신은 내 입장이 되어 보지 않아서 모른다.” 는 말을 합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 본인이 처한 고통이 무척 크고 어렵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제 고통을 아신다면 저를 이렇게 버려둘 수 있습니까?” 라며 하소연을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내 입장이 되어 본 사람입니다.
이사야 53장 3절을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고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가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습니까? 예수님도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습니다. 내가 고통과 병고 속에 있습니까? 예수님도 고통과 병고를 겪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피해갈 만큼 멸시를 당하였고, 업신여김을 당했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멸시를 당했고, 업신여김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당할 이유가 없으신데 나와 같은 사람으로서 모든 것을 겪기 위해 당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어떤 처지에 있던 예수님께서는 내 처지가 되어 본 사람이며, 내가 어떤 상황에 있던 예수님께서는 내 상황이 되어 본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 다시 말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는 것은 내 처지가 되어 본 하나님으로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부활승천하신 후,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28장20절 말씀을 보면,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은 부활승천하심으로 우리를 떠나가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활승천하심으로 영원한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또한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34절을 보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우편이라는 것은 능력과 지배를 상징합니다. 시편 16편8절을 보면,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고 노래합니다. 또한 우편이라는 것은 종말론적 의미가 있습니다. 최후 심판의 자리를 상징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인자가 오셔서 양들을 자신의 오른편에 두고 그의 나라에 받아들이시고, 염소들 즉 저주받은 자들은 그의 왼편에 놓여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양들을 예수님이 앉아 계시는 쪽에 두심으로 이들이 바로 자기 백성임을 선포하실 것입니다.
그 날이 될 때 까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지금도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십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죄에서 구원할 하나님으로 오셨고, 마지막 날 우리들을 주님 오른편에 두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 임을 선포하실 그 날 까지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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