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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마태복음

마태복음 4장,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by 영구한도성 2022. 7. 19.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1 그 때에 예수께서 聖靈에게 이끌리어 魔鬼에게 試驗을 받으러 曠野로 가사
2 四十 日을 밤낮으로 禁食하신 後에 주리신지라
3 試驗하는 者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萬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命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對答하여 이르시되 記錄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라도 배가 불러야 흥이 나지 배가 고파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일제 식민지와 한국 전쟁을 겪은 시대는 보릿고개라는 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 해 가을에 수확한 양식이 바닥나고, 올해 농사지은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은 5 ~ 6월, 식량 사정이 매우 어려운 시기를 의미합니다. 일제 식민지 시기의 식량 수탈과 한국 전쟁으로 인해 당시 사람들은 이 시기에 극심한 굶주림 속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먹는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대통령 당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적으로 달성되고, 새마을운동이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면서 부터일 것입니다.

지금은 너무 먹어서 다이어트를 해야 할 사람이 넘쳐나고 있을 정도입니다. TV에는 다이어트 관련 정보와 프로그램이 많이 등장합니다. 강호동이 진행하는 스타킹이라는 프로그램에는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날씬한 몸매를 보여 주는 사람들이 출연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이젠 자신감 있는 몸매를 가진 것으로 인해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이런 저런 일로 울 일이 많이 있는데, 이제는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보릿고개를 겪으신 어르신들이 이 장면을 보면 “세상이 많이 바뀌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감정을 감추기 힘들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은 굶고 지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최소한 먹는 문제에 있어서는 Food Bank라든지, 공공기관이라든지, 종교단체 등을 통해서 사회적 안전망이 제법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세계적으로 보면, 여전히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의 수는 FAO 즉, 식량농업기구의 발표(2010년) 에 따르면 9억2천500만명이라고 합니다. 현재 전세계 인구가 60억명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6명 당 1명이 영양실조에 허덕인다는 통계입니다.

더 큰 문제는 먹을 것이 너무 넘쳐나는 나라와 절대빈곤에 허덕이는 나라가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4장 1절-4절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를 말씀합니다. 

오늘날 떡의 문제는 2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떡 문제 자체, 즉 절대빈곤의 문제와 떡의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어떤 떡을 먹을 것인가에 대한 상대적 빈곤의 문제입니다. 외식을 할 때 늘 짜장면이나 국밥 정도만 먹어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최고급 일식요리와 흔치 않은 서양요리를 먹을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끼니 문제가 없는 사람도 좀 더 나은 음식을 먹지 못하면 늘 자신은 못 먹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는 말씀은 오늘날 어떻게 적용되겠습니까?

오늘날 떡이라는 것은 먹는 문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관련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육체와 관련된 것은 떡 뿐 만 아니라 옷과 주택까지 포함됩니다. 또한 내 삶의 안전을 확보하고 이 안전을 공고히 하기 위해 만들어 나가는 모든 일들이 떡 문제입니다. 나아가서 부모로서 자기 살아생전에 큰 떡을 만들어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도 떡에 관한 것입니다. 즉 생활자체와 이것을 더욱 유지시키기 위해 관련된 모든 것이 떡인 것입니다.

돈이 넉넉한 사람은 좋은 음식, 좋은 옷, 크고 멋진 주택에서 살지만 돈이 넉넉지 못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넉넉한 사람은 자녀에게도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이러한 문제에 매여 살기 쉽습니다. 넉넉하지 못한 사람은 생업 자체에 매이고, 넉넉한 사람은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고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습관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떡에 관한 모든 고민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떡에 관한 시험을 광야에서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2절 말씀을 보면,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시고 주리신 후에 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시험을 받으신 장소, 육체가 어떤 상태에서 이 시험을 받으셨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넉넉하지 못한 사람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라고 말씀하면,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 는 쓴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넉넉한 사람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라고 말씀하면, “고리타분한 얘기 그만하라.” 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시고 주리신 후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면, 내 삶의 정황을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나의 욕심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극심한 배고픔 속에서 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권능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배고픔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택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이 육체적인 존재이고,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며, 또한 육체적 문제와 영적문제가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우선시 되는 것은 영적문제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육체적인 문제에는 민감하지만 영의 문제에는 민감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육체의 배고픔은 쉽게 느낍니다. 그러나 영의 배고픔은 쉽게 느끼지 못합니다.

사람과 다른 피조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장26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존귀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24절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11절 말씀에 따르면,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라고 말씀하면서 사람 역시 영적존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면 영의 배고픔을 민감하게 느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떡의 문제에 매이기 시작하면서 영적으로 초라해 지기 시작합니다.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초라해 지고, 있는 사람은 있는 사람대로 초라해 집니다. 없는 사람은 생업자체에 매여서 영적으로 초라해 지고, 있는 사람은 더 가질려고 하는 욕심 때문에 영적으로 초라해 집니다.

이 세상이 평화롭지 못하고 살벌한 것은 인류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인류의 죄악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떡의 문제에 매여 끊임없이 욕심을 쫓아 사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IMF때 수많은 가정이 단지 떡의 문제 때문에 이혼했고, 자녀들이 버려졌습니다. 만일 부부가 그 힘든 시기를 죽어도 함께 죽을 각오로 대응했다면 가정은 파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보다 강력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 떡의 문제까지 해결하고 떡의 문제에 매이지 않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믿으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업신여깁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말해도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밥도 나오고 떡도 나온다.” 고 말을 해도 됩니다.

이것은 기복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망하게 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셨습니다. 또한 신명기 8장4절을 보면, 하나님은 광야생활 사십 년 동안에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도록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육의 양식도 있고 영의 양식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사람은 육적으로도 망하지 않고 영적으로도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 속에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이 있고, 내 영혼의 구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하게 알려면 삶 가운데서 광야를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말씀으로 이 시험을 이기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생활 40년 동안에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끝없는 모래사막만 보이고, 도와 줄 사람은 없으며, 오아시스 없는 사막처럼 지금 당장 먹을 것이 없는 상황을 경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그 어느 때 보다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라는 말씀은 내가 사는 의미와 목적이 하나님 때문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풍족해도 사는 의미와 목적을 모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야 삶의 의미와 목적이 생깁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사람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오직 하나님에게 두는 사람입니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 역시 떡입니다. 그런데 이 떡은 생명의 떡입니다. 요한복음6장3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라고 할 때 떡은 육체의 생명을 위한 떡입니다. 언젠가는 죽을 몸을 위한 떡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으로 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할 때 이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떡입니다.

성도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떡을 먹으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마6:25)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고 입히실 뿐만 아니라 나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문제는 육체적 생명, 다시 말해 유한적 생명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영적 생명,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밤낮으로 주리시고 금식하신 날 수 40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의미와 그 중요성을 부각시켜 줍니다.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시험받은 것, 모세가 시내산에서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한 것, 엘리야가 사십주야를 금식한 사건을 연상시켜 줍니다. 그 밖에도 홍수의 40일, 부활 후 40일 사십이란 숫자는 흔히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십 일 기간에 걸쳐 금식하신 후 주리시는 고통을 견디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금식이라는 실천된 행동을 통해 첫 번째 시험이 굶주림을 만족시키기 위한 세상적 정욕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면서도 탐욕으로 흐르기 쉬운 욕구입니다.

마귀는 가장 기본적인 이 욕구를 공격해서 사람을 시험합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아버지 되신 하나님에 대한 실망감을 갖게 만듭니다.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에 불신하게 만듭니다.

사람이 하루 중 나누는 대화의 많은 내용이 떡의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이 떡을 어떻게 확보하고, 이 떡을 어떻게 유지시키는냐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 세상의 떡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시험에 들곤 합니다.

IMF 때 많은 가정이 떡 문제로 이혼하고, 자녀들이 버려진 이유가 물론 떡 문제로 인한 것이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 떡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가 가족간의 신뢰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가정을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불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떡 문제는 평소에 늘 시험받는 내용이지만, 인생의 어떤 시점에 심각한 시험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심각한 시기는 내 인생의 40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40일로 끝날 지, 40년이 될지 모르지만 이 시기는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간이며, 영적으로 큰 고비를 넘기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 때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것을 생각하며,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하나님과 살고, 망해도 하나님과 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떡 문제는 더 이상 나에게 시험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을 망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신명기 32장10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고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라는 곳은 황무지이며,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입니다. 지금은 눈을 뜨고 있어도 코 베어가는 세상입니다. 더구나 이 세상에는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인해 해외에 이민가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한반도를 떠난다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안전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내 생명의 주인이시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영생의 떡으로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