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은 한국선교가 100주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할아버지, 할머니 때부터 믿은 가정이 4대 째 믿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가 믿어서 자녀가 어린시절부터 교회에 출석하고 복음을 듣게 되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자녀가 부모의 기도 속에 자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대대로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있는 이들에게 더욱 영적으로 깨어있고, 긴장하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당시 종교적으로 가장 자부심이 강했던 사람 부류는 종교지도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민족 자체가 선민사상이 있어서 그 나라 백성자체가 종교적으로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선민사상, 종교적 자부심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긴 역사에 비하면 한국선교 100년사에서 겨우 믿음의 가정 4대 째라는 것은 비교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 1절-12절은 세례요한의 선포입니다.
본문말씀에 따르면 문제는 역사의 길이가 아닙니다. 9절 말씀을 보면, 세례요한이 이렇게 선포합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오늘날 이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희 가정이 믿음의 가정 몇 대 째인 것을 자랑하지 말라.” 는 것입니다. 내가 몇 대 째 믿음의 가정이라는 것은 감사의 제목이지 자랑할 제목이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는 것은 감사의 제목이지 자랑할 제목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민족과 종교지도자들의 선민사상에 근거한 교만을 세례요한이 지적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몇 대 째 믿는 믿음의 사람인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신앙의 현주소이며,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기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8절 말씀을 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고 말씀합니다. 세례요한이 보았을 때, 종교지도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지식의 말씀은 있었지만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기는 핵심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누가 회개합니까?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아는 사람이 회개를 합니다. 또한 참다운 회개를 하는 사람이 열매를 맺습니다. 대충 “무엇 무엇 잘못했습니다.” 라고 아뢰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이것은 반성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전적타락과 무능과 무지를 인정하고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세입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라고 고백을 했고, 그러한 회개 속에 이방선교의 열매를 맺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세례요한의 설교가 우습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설교가 우습게 들렸던 것은 그들의 교만이 그들의 귀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우리의 마음이 교만하다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면 회개의 심령이 들지 않습니다. 회개의 심령이 들지 않는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때 누구에게나 발생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통곡하며 울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사람은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을 생각합니다.
12절은 주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십니다.
마지막 날 내가 알곡이 아니었고 쭉정이었다면 이것보다 슬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요한의 메시지,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는 말씀을 영접하고, 영적긴장의 끈을 늦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단종교에 속한 교리들의 공통점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회개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단종교에 속한 자들만 쭉정이가 아닐 것입니다. 교회 안에 알곡이 있고, 쭉정이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십자가 앞에 회개가 없는 사람은 쭉정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를 가로막고 있는 모든 옷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불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겉모습에 대해서 마태복음 23장5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세례요한은 비록 남루한 낙타털 옷을 입고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산 사람이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거룩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사람에게 모든 행위를 보이고자 산 사람이었습니다.
양파의 껍질은 총 8겹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할 때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이렇게 겹겹이 싸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할 때 이러한 껍질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야 합니다. 그것이 교만의 껍질이든, 사람 앞에 사는 외식된 행동의 껍질이든 벗겨내야 합니다. 그것이 체면의 껍질이든, 종교적 껍질이든 벗겨내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산 모습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원초적인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선 한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껍질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자의 모습, 하나님 앞에 헌신된 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자세이며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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