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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요한복음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

by 영구한도성 2022. 7. 21.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 그런데 바리새人 中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人의 指導者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當身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先生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當身이 行하시는 이 表蹟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對答하여 이르시되 眞實로 眞實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番째 母胎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對答하시되 眞實로 眞實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聖靈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肉으로 난 것은 肉이요 靈으로 난 것은 靈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任意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聖靈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對答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對答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先生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眞實로 眞實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證言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證言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者 곧 人子 外에는 하늘에 올라간 者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曠野에서 뱀을 든 것 같이 人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者마다 永生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가 인정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시고, 예수님의 표적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 이라고 할 때, ‘이 표적’ 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가 ‘타우타 타 세메이아’ 인데, 표적에 대해서 관심이 깊은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의 혼례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표적을 보이셨고, 요한복음 2장23절을 보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표적을 행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이 표적들을 직접 보았거나,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말을 듣고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는 표적에 대해서 말했는데, 예수님은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멘’에서 유래했습니다. ‘아멘’ 은 ‘믿는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로, 진실로 라는 말은 신뢰할 수 있는 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로, 진실로 라는 말은 “참으로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으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표적’ 에 대해서가 아니라, ‘거듭남’ 에 대해서입니다. 참으로 알아야 할 것은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문제는 거듭남의 문제이고, 하나님나라를 보지 못하는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각기 다양한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문제가 중요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저 문제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1차적인 영적 문제는 거듭남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가 찾아왔을 때, 니고데모의 문제를 ‘거듭남’ 의 문제로 보셨습니다. 왜냐하면 니고데모는 아직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대인의 지도자이며, 이스라엘의 랍비입니다. 그리고 바리새파 종교지도자이며,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의 프로필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로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라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행정부와 사법부와 입법부를 합친 개념입니다. 로마지배시대 때, 유대인 사회의 정치, 행정, 법 질서를 위한 가장 강력한 기구였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행정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치안관이 구속명령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사형에 해당하지 않는 사건을 재판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총 7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니고데모가 그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니고데모는 바리새파에 속하는 종교지도자입니다. 당시 백성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종교지도자가 바리새파였습니다.

 

그리고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선생을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탈무드에 따르면 랍비는 자기 아버지보다도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아도 랍비의 말은 들어야 한다.” 고 훈계했습니다. 니고데모가 그런 랍비였습니다.

 

니고데모의 프로필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장례를 치루기 위하여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져 왔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1리트라는 약 327그램인데, 백 리트라이니까 약 32kg의 몰약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몰약은 값비싼 향료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32kg의 몰약의 값어치가 지금 시세로 1,000만원 내외라고 합니다. 즉, 니고데모는 상당한 수준의 부자였습니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니고데모는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이름의 뜻도 이것을 잘 설명합니다. 니고데모라는 이름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자’ 란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 니고데모는 단지 거듭나지 못한 자였습니다. 더구나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종교지도자입니다. 성경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역을 하면서 속고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새가족이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 사람이 복음을 영접했는지 여부는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의 주된 관심은 복음의 영접여부가 아니라 출석여부입니다. 교회봉사를 열심히 하면 신앙심이 깊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인들과의 관계성이 좋으면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생활 오래 했다면 “구원받았을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거듭났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교회 출석 자체가 거듭남을 보증하지 못하고, 교회봉사 자체도 거듭남을 보증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교인들과의 관계성을 좋다고 거듭남을 보증하지 못합니다. 교회생활 연수가 거듭남을 보증하지 못합니다.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는 기질이라서 교회출석을 열심히 하는 사람도 있고, 원래 봉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교회봉사를 열심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랫동안 다녀도, 믿음으로 교회를 다닌 것이 아니라 습관이나 다른 목적 때문에 교회를 다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거듭남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첫 출생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건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건에 따라 태어난 것입니다. 거듭남도 그렇습니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거듭나는 모든 사람도 본인이 원해서 거듭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거듭나게 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듭남의 의미에 대해서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 묻습니다. 니고데모가 출생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아이는 어머니 뱃속에서 10개월을 채우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한 번의 출생에 대해서 말씀하시니, 다시 출생하기 위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한 일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의 비밀을 물과 성령에 두고 있습니다. 물이라는 것은 말씀인데, 헬라어로 ‘엔 레마티’ 라고 합니다. ‘엔 레마티’ 라는 것은 ‘말씀 안에서’ 인데, 말씀 안에서 잉태함을 뜻합니다. 거듭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 말씀 안에서 잉태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비밀은 성령입니다. 헬라어로 ‘에크 프뉴마토스’ 인데, ‘성령으로부터’ 라고 해석됩니다. 여기서 ‘성령으로부터’ 라는 것은 ‘위에서부터’ 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거듭남이라는 것은 사람이 말씀 안에서 잉태되는데, 그 말씀의 기원은 위에서 부터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육신이 땅의 부모로부터 피와 살을 물려받듯이, 천국시민은 위에 계신 하늘아버지에 의해 새롭게 피와 살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무척 상식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6절과 7절을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말씀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지구상에는 신생아들이 태어나면서 첫 울음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이제 막 거듭난 자들이 첫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거듭나는 순간을 바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말씀합니다.

 

얘기를 나누는 지금 시간이 한 밤중인데, 팔레스틴의 날씨가 그러하듯 신선한 미풍이 예수님과 니고데모를 감싸고 있을 것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을 바람에 빗대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니고데모는 자신을 휘감고 있는 팔레스틴의 바람을 느꼈을 것입니다.

 

원래 성령을 뜻하는 원어에서는 ‘바람’ 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바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바람이 어디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느 방향으로 부는 지 알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이 바람을 막을 수도 없고, 인간의 노력으로 바꿀 수도 없습니다. 거듭나게 하는 역사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성령의 바람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지 모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초등학교 때 어느 교회 예배에서 슬라이더를 보았는데, 슬라이더 속에 있던 예수님 사진에서 빛이 나와서 자기 가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저는 그 사람이 그 때 거듭났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바람같이 임하시는 성령을 생각할 때 그 사람이 그 때 거듭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람에 휘날리는 버려진 전도지를 보고 거듭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 따라 교회에 놀러 왔다가 거듭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한부 인생을 사는 절실한 삶의 상황에서 거듭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진리에 대해서 갈망하다가 거듭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듭나는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자기가 언제 거듭났는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거듭났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마치 이와 같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생년월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생년월일은 본인 스스로 아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가르쳐줘서 아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 날 태어났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사람은 언제 자기가 태어났는가를 스스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태어나서 자라면서 자기 존재에 대해 인식해 가는 것입니다.

거듭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임의로 역사하는 성령의 바람에 의해 사람은 거듭납니다. 그러나 자기는 언제 거듭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적 신생아 단계를 벗어나면서 자기가 거듭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거듭남은 하늘에 속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실 때, 니고데모는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반문합니다. 왜냐하면 니고데모는 땅에 속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성경에 정통한 종교지도자라 해도 땅에 속한 사고방식으로는 하늘 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땅에 속한 사고방식이 있듯이, 하늘에 속한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사고방식은 한 마디로 믿음에 속한 사고방식입니다. 땅에 속한 사고방식을 가진 과학자들은 이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진화론이나 빅뱅이론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믿음으로 압니다.

 

땅에 속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만일 천국에도 낙타가 있고 바늘이 있다면 천국에서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천국은 믿음의 나라입니다. 그렇기에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를 믿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는 하늘에 속한 것을 보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것을 보고 말씀하시는 분을 믿는 것입니다. 인자가 말씀하시는 하늘에 속한 구원의 열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얻는다.”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속한 구원의 열쇠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십자가입니다. 나의 죄와 허물을 대신해서 저주를 당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생을 얻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죽음을 대전제로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다시 난다는 의미에 대해서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개종자가 유대교에 입적할 때 기도와 희생제사를 드리고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희생제사가 무엇입니까? 죽음을 뜻합니다. 죽음은 과거 연관된 모든 것들의 파괴를 뜻합니다.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다 함은 육에 속한 내가 모두 파괴되어 죽는 것을 뜻합니다. 모두 파괴되어 없어져야 새로운 출생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는데, 바로 그 인자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와의 첫 대화에서 ‘거듭남’ 에 대해서 화두를 던지셨고, 이제 ‘영생’ 에 대해서 거듭남의 의미를 정리하십니다.

 

거듭남은 출생의 시작을 말하고, 영생은 거듭난 사람들의 삶의 속성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영생입니다. 그래서 영생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 함은 영생의 하나님 속에 들어감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는다 함은 영원한 생명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생이신 하나님 품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역사를 말합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 품속은 어떠합니까? 평안합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그래서 영생이 있는 사람은 세상 권세자 앞에서 두려워하지도 않고, 아첨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영생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즐거움도 그 즐거움이 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즐거움은 하나님 품속에 있는 즐거움입니다. 이 땅에서도 사람은 가끔 여유와 평화를 맛봅니다. 그러나 하나님 품속에는 궁극적인 여유와 평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는다는 표현도 맞지만, 영생을 누린다는 표현도 맞습니다. 우리는 영생이신 하나님 안에서 평화와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

 

15절에 ‘믿는 자’ 라는 것은 헬라어로 ‘파스 호 피스튜온’ 인데, 이것은 현재에 믿는 개개인을 뜻합니다. 즉 여기서 믿는 자라는 것은 현재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입니다.

 

즉 믿고 있는 자입니다. 믿고 있는 자는 하나님 품속의 즐거움이 진행되어 나가고, 현재 믿고 있는 자는 하나님 품속에서 궁극적인 여유와 평화가 진행되어 나갑니다. 영생이신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과 하나님나라를 비교하면 이렇습니다. 에덴동산은 죄 없는 인간이 살 수 있는 완전한 동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나라는 거듭난 사람이 살 수 있는 나라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하나님나라에서는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에덴동산은 완전한 곳,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영원토록 살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즉, 관계성이 제한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제한된 그 관계성이 해결된 곳입니다.

 

그러므로 첫 사람은 아담은 에덴동산에 영생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누리며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영생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누리며 사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뿐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만이 영생이신 하나님 품속에서 그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에 두시고 옆에서 지켜보셨지만, 이제 하나님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셔서 품에 안으신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밤에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내용을 보면, 밤... 조용한 시간에 어울리는 대화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출생이라는 것,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은 어두운 밤에 빛이 비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태아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깜깜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무엇을 봅니까? 빛을 봅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다음 날 아침을 맞이하게 됩니다. 과연 그 아침이 지금까지와 똑 같은 아침이었을까요? 비록 똑 같이 동쪽에서 떠는 태양을 보고, 항상 보는 그 태양을 보았겠지만, 니고데모의 심령은 완전히 다른 태양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내내 거듭남에 대해서 영생에 대해서 되 새겼을 것입니다. 니고데모 역시 언제 거듭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니고데모가 믿음의 사람이 되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5절을 보면,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말씀합니다.

 

처음 거듭날 때는 믿음에 대해서 확증하지 못합니다. 언제 거듭났는지 조차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믿음을 확증해야 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을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마치 신생아가 처음 태어났을 때는 자기 부모가 누구인지를 모르지만, 점점 자라면서 자기 부모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나중에는 아는 것에서 거치지 않습니다. 인격적인 교감이 점점 깊어집니다. 나중에는 부모와 어려운 대화도 가능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교감이 그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