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다람쥐 쳇 바퀴도는 것에 비유합니다. 어제 한 일 또 하고 오늘 한 일 내일 또 합니다. 무언가 목표를 세우고 전진하는 것 같지만 세월이 지나 서 있는 지점을 보면 여전히 제자리라는 것입니다.
전도서 1:9에는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모두는 당장 내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직장에 가야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업체에 나가야 하며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가사노동을 해야 하며, 여느 때와 같이 학생들은 학교에 가야 합니다.
직장인들 대부분이 월요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난 한 주 동안 했던 그 지겨운 일을 금주에도 반복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괴로운 요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나마 괜챦은 직장은 토요일에 쉬기도 하지만 결국 주일 오후가 되면 내일 출근할 것을 생각하니 부담이 됩니다. 사업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크게 떼돈을 벌면 좀 재미가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반복되는 이 일에 대해 염증이 생깁니다.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도 바로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그녀는 정오시간에 물을 긷기 위해 우물에 오는 일을 반복하면서 살았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삶에 찌든 그녀가 메시야를 만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아무런 낙(樂)도 없이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던 한 여자에게 유대의 한 청년이 다가가서 그녀의 삶을 통채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서 갈릴리로 가실 때 일입니다. 4절을 보면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마리아는 앗수르의 침략 후, 앗수르의 이주정책으로 혼혈족이 된 지방입니다. 그래서 혈통과 신앙의 순수성을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유대사람은 사마리아 땅으로 가는 것을 꺼려하였습니다. 갈릴리로 가는 길은 사마리아가 지름길입니다. 그러나 유대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을 상종치 않았기 때문에 멀리 돌아서 갈릴리로 갔습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는 말씀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사마리아로 가겠다는 주님의 의도가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나와의 만남은 주님의 의도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계획하시고 주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주님과 나의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주님과 나와의 만남은 필연입니다. 우리 각자는 어쩌다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모태신앙이라서 자연스럽게 주님을 만난 것도 아닙니다. ‘내가 너를 만나야 하겠다.’ 는 주님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의도 때문에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은혜’ 라는 것은 공짜로 받은 선물입니다. 내가 주님을 우연히 만났다면 그것은 ‘은혜’ 가 아닙니다. 내가 의도해서 주님을 만났다고 한다면 그것 역시 ‘은혜’ 가 아닙니다. 오직 주님께서 나를 만날 것을 계획하시고 주님께서 나를 직접 찾아 오셨기 때문에 ‘은혜’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6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만일 내가 주님을 선택했다고 생각한다면 언제든지 내가 주님을 버릴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주님과 나와의 관계는 절대로 깨어질 수 없음을 압니다. 세상이 두 조각이 나도 깨어질 수 없는 것이 주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감사할 이유를 찾는다면 주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나의 인생길은 주님의 의도와 계획안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의도와 계획은 항상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8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라는 것은 기쁜 일 뿐만 아니라 슬픈 일도 포함됩니다. 내가 견뎌내기 힘들고 너무너무 고통스러운 모든 일이 포함됩니다. 모든 것이라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건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낸다는 것입니다.
합력이라는 것은 ‘힘을 합친다.’는 뜻입니다. 즉 기쁜 일과 슬픈 일이 서로 힘을 합쳐서 선을 이루어 낸다는 것입니다. 즐거운 일과 고통스러운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낸다는 것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구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에게 힘든 인생역정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가정적으로 너무 힘들고 괴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러한 힘든 인생을 살았기에 주님의 생명수에 눈을 뜨고 마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13:12에는 ‘밤이 깊으면 낮이 가까와 온다’ 고 하였습니다. 나의 인생이 여러가지 사건으로 너무 괴롭다는 것은 이제 태양이 떠오르는 밝은 아침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과 같습니다. 또한 이 사실을 더욱 믿을 수 있는 것은 나의 인생을 주님께서 계획하시고 의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가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말씀하실 때,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서 통행하실 길목을 열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마리아인 우리의 인생길을 통행하시기를 원하실 때 거부하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길목을 주님께 열어드리고 주님께서 지나가시도록만 한다면 근본적으로 축복을 받을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사마리아를 통행하실 때 만난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님은 수가라는 동네의 야곱의 우물가에서 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6절을 보면 이 여인을 만날 때 쯤 상황이 나옵니다. 주님은 먼 여행길에 피로로 인하여 지쳐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 시간은 중동에서 가장 더운 낮 시간이었습니다. 7절을 보면 주님은 목이 너무 마르셔서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 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피곤해 지쳐 한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은 철저히 주님은 사람이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그냥 하나님의 아들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 분에게는 그다지 힘든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며 사단의 시험을 이기신 것도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수많은 병자를 치료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참혹한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성육신 하신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히브리서 4:15에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우리와 같이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한결같이’ 라는 말은 ‘변함없이’ ‘동등하게’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전혀 차이가 없는 완전한 사람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종종 자신을 가리켜 ‘인자’ 곧 ‘사람의 아들’ 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 이시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주님은 우리에게 전능한 하나님으로서 의지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 로서 주님은 내게 ‘위로의 주님’ 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과부사정 과부가 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사정은 사람이 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시기 때문에 나를 아시는 것입니다.
내가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습니까? 주님도 질병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이사야 53장의 내용을 공동번역서과 새번역서를 참조하면 이렇습니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앓아야 할 질병을 대신 앓아 주셨습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해서 건강하게 사셨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완전한 사람이시기에 우리처럼 똑 같이 병을 앓으면서 사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서러울 때는 아플 때 입니다. 부부지간도 대신 앓아 줄 수는 없습니다. 자식이 아파도 부모가 대신 앓아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나의 병을 대신 앓아주신 분이시며, 나의 질병을 대신 지신 분이십니다.
또한 내가 외롭습니까?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외로움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외로임이 너무 커서 하나님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라고 절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십자가의 잔을 마시는 것이 결코 쉬웠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이시기에 너무너무 힘드셔서 그 잔을 마시기 위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는 것처럼 되기까지 기도하셔야만 했습니다. 주님은 나와 전혀 차이가 없는 사람이셨습니다. 내가 당하는 모든 것을 겪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당하는 어려움은 내가 홀로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함께 나의 고난을 겪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혼자 그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혹 나의 가족마저 나의 외로움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나의 외로움을 아시고 몸소 겪으신 것입니다.
로마서 8:26절에는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너무 힘들때는 기도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 모릅니다. 오히려 한탄스럽고 하나님이 원망스럽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는 성령께서는 나를 너무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 아시고 대신 기도하십니다. 내가 기도할 힘이 없어 쓰러져 있는 그 시간에도 성령께서는 기도하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소리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이 사실은 내가 당하는 어려움이나 고통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말해 줍니다. 내가 당하는 어려움이나 고통 속에 주님의 임재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님,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먼 여행길에 지쳐 목이 마른 한 사람, 이스라엘의 평범한 청년이기도 한 예수님은 낯선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 고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사마리아 여인의 인생을 한 순간에 바꾸는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중동의 대낮 기온은 모래바닥에 계란을 깨면 바로 후라이가 될 정도로 뜨겁습니다. 그래서 머리가 태양 빛에 타지 않기 위해 수건을 쓰고 다닙니다. 더운 날씨 탓에 물을 긷는 일은 가급적이면 서늘한 저녁에 합니다. 동네 아낙네들은 모두 물을 긷기 위해 끼리끼리 모여서 저녁에 우물가에 옵니다. 그러나 이 여인만은 태양이 중천에 떠 있는 정오 시간에 홀로 오곤 했습니다. 이것은 이 여인이 무언가 말 못할 사연이 있는 사람임을 알려줍니다.
우물은 슬픈 그녀의 인생의 상징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우물증 초기 증세나 약간 진행된 상태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확하게 그녀의 우울증의 정도는 알 수 없습니다. 단지 미루어 짐작할 뿐입니다. 그녀는 멸시받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다섯 명의 남편을 거쳤고 현재 어떤 남자와 동거(요4:18)하고 있습니다. 특히 더운 낮 시간에 혼자 우물을 긷기 위해 온 이유는 이런 부끄러운 가정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녀와 예수님의 대화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대해 말했을 때, 그녀는 “이런 물을 내게 주셔서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해 주십시오.” 라고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즐거운 마음으로 물을 긷기 위해 오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 일을 하기 싫었습니다. 그녀는 상당한 부분에서 삶의 의욕을 상실해 있는 상태였습니다. 특히 남 몰래 더운 낮 시간에 오는 이 일은 더더욱 하기 싫었습니다. 이 여인은 삶의 의욕을 거의 잃은 상태이고 심리적으로 대단히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울증은 의욕상실로 이어져서 평생토록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문가에 의하면 우울증이 심한 경우에는 자살과 같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주부우울증이라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산업사회에서는 인구의 60%이상이 우울증 환자인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30% 정도는 매우 심각한 상태여서 전문가의 치료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시대입니다. 컴퓨터의 가상공간에서 사람을 만나고 실제로 사람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도 우울증으로 가는 하나의 길입니다.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생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갈 수가 있다” 고 말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스스로 살아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살면서 살아야 할 이유를 점점 잃어버리면서 우울증 환자가 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렇게 된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본문에서는 복잡한 그녀의 사생활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다양한 이유로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여러 이유로 살아야 할 이유를 상실하면서 삽니다.
아시아 국가의 행복도 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낮은 방글라데시가 행복도 조사에서 1위로 나타났고,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일본이 행복도 조사에서 꼴찌를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자살률이 아시아 최고로 나타났습니다. 일본의 최상단의 섬인 홋가이도섬에는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이 찾는 산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현대인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데, 뜨거운 대낮에 물을 긷기 위해 매일 와야만 하는 사마리아 여자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깨닫지 못하는데 매일 어쩔 수 없이 반복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그 일이 얼마나 싫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인간 스스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3절 말씀처럼 “이 우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다.”(요4:14)는 주님의 말씀이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좀 달라” 고 부탁하셨을 때, 사마리아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이 무시하는 사마리아 사람이고 그리고 여자인데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너에게 물 좀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누구인 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고 그가 생수라는 것을 너에게 주었을 것이다.”
즉 사마리아 여인의 문제는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고, 자신과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이심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4:6에서 주님은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문제를 매우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되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자는 건강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자이면서 건강한 사람은 집안에 문제가 없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한 사람은 명예가 없어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결코 만족하면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1968년에 ‘설국(雪國)’ 이라는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받으며 최고의 명예를 거머쥐었던 일본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라는 사람은 노벨상을 수상한 후 자신의 별장에서 자살을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추구한 후, 가장 마지막에 추구하는 명예라는 것도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불행한 이유를 참으로 다양하고 복잡하게 생각하지만 주님은 단 한 가지로 보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결국 네가 불행한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나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문제는 겉으로는 가정문제입니다. 그러나 안으로는 길을 모르는 문제, 진리를 모르는 문제, 그리고 죽음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만일 내가 방황하고 괴롭다면 이 세 가지의 문제 중에서 찾아서 기도하고 그 길을 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대해서 얘기하고 여자는 이런 물을 달라고 요청했을 때, 주님은 갑자기 “남편을 불러오라.” 는 가정문제를 꺼집어 내었습니다. 깜짝 놀란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여인의 부끄러운 과거를 한 순간에 모두 드러내었습니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표현은 매우 부드러운 표현인데, 결국은 이런 얘기입니다. “너는 다섯 명의 남자를 거치며 결혼했고, 지금 또 어떤 남자와 살고 있는데 그 남자와는 그냥 동거하고 있는 중이구나. 그러니까 너의 말도 틀린말은 아니다.” 라는 얘기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를 마시기 위해서는 남편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남편문제는 죄 문제일 수도 있고, 나를 괴롭게 만드는 인생문제일수도 있습니다. 이사야 1:18에서는『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예레미야는 이사야가 선포하고 있는 죄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13에는 두 가지 죄에 대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우선 사람의 죄악이라는 것은 생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또 하나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스스로 판 웅덩이라는 것은 정욕과 이기심에 기초하여 판 웅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판 웅덩이는 물을 저축하지 못하는 바닥이 터진 웅덩이인데 그것도 모르고 열심히 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밑바진 독에 물 붇기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밑바진 독에 물을 붓는 삶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삶은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안에 거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단지 그분이 주시는 물을 마시며 그 분을 의탁하며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평안합니다. 요한복음 14:27에서 예수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리석게 정욕과 이기심의 웅덩이를 파면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웅덩이를 파는 것을 그만둔다면 더 이상 근심과 두려움이 나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모든 문제해결의 근본은 주님과의 만남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을 만난 것처럼 말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과 주님이 주고 받은 대화가 몇 마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생수란 무엇이다.’ 라고 구구절절히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14절을 보면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고 말씀하셨을 따름입니다. 이 말씀은 생수의 의미도 포함되지만 생수를 주는 자가 누구인가? 에 대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라는 것은 많은 말로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오직 체험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녀가 체험했던 생수라는 것은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계 7: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계 22: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계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그녀가 체험했던 생수라는 것은 바로 생명수입니다. 즉 생명의 물입니다. 이 생명의 물은 목마른 사람이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또한 어린 양이신 주님이 직접 이 생명수를 퍼서 세상에서 고통 받았던 나의 눈물을 씻어 주십니다. 우리 중에는 유달리 이 세상에서 많은 눈물을 흘리며 사신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 양이신 주님께서 직접 그 분의 모든 눈물을 생명수를 퍼서 닦아 주실 것입니다. 또한 생명수는 하나의 강을 형성하고 있는데, 너무나 풍부하여 원하는 사람은 값없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나라에 속한 사람 중 원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생명수 강에서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여자는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게 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수가라는 동네의 이름 모를 여인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생명책에 이름을 등록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이미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시작되었으며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나라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나라를 새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21:2에는『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계시록 21:10에는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라고 하며 종말시대에 사는 신자에게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가 매일 반복되는 일만 하며 다람쥐쳇바퀴 돌듯이 그 자리에만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새 예루살렘을 향해 옮기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매일 그 자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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