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쫓는 무리가 기하급수적으로(幾何級數的-수가 거듭할 때마다 두 배의 비율로 늘어나는 (것)) 늘어나게 된 계기가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이적의 사건을 보이셨습니다. 이런 이적의 사건을 보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 얘기하면,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 하나로 초대형 교회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런데 먹을 것을 주는 메시야로 알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요한복음 6장 51절을 보면,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말씀하십니다. 떡이나 물고기는 일반적인 ‘먹을거리’ 입니다. 그런데 이런 음식을 주는 메시야로 알다가, 예수라는 사람이 자기 살을 주겠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고 반문합니다. “어떻게 자기의 인육(人肉)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할 수 있겠느냐?” 는 말입니다. 그들은 도저히 예수라는 사람의 말을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60절을 보면, 여러 제자들도 “이 말씀은 어렵다” 고 수군거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장에서도 ‘무슨 말씀인가?’ 하여 수군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서로 수군거리고 있는 줄 아시고,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고 묻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보충설명을 하십니다. 그 보충설명이 무엇입니까? 63절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 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겠다고 하신 ‘살’ 은 일반적인 ‘살’ 이 아니라, ‘영’ 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영’ 이십니다. 예수님은 ‘영’ 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 이십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계신 말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요1:1-14) 따라서 ‘내 살을 주어 먹도록 하겠다.’ 는 말씀은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 먹도록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보충설명 하신 후,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64절에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다.”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직 믿음으로만 영의 말씀을 먹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65절을 보면,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자만 믿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자만 영의 말씀을 먹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던지자 이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자체가 먹을 수 있는 영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자만 예수님께로 올 수 있다는 말씀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때부터 예수님의 제자 중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떠난 텅 빈 자리에서, 예수님은 열 두 명의 제자에게 “너희도 가겠느냐?” 고 묻습니다. 그 때 시몬 베드로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68절 말씀을 보면,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한 순간에 초대형 교회를 이루셨지만, 예수님은 한 순간에 수많은 무리를 떠나보내셨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떠난 그 텅 빈 자리에서 시몬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고백합니다. 시몬 베드로의 말은 다른 사람은 다 떠난 다 해도,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음을 아는 사람들은 떠나지 않는다는 대답입니다.
우리는 필요하다면, 교회에서 모든 사람이 자리를 떠난 후, 혼자 텅 빈 예배당 의자에 앉아 베드로의 고백을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과연 내가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남아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다닌 세월 때문입니까? 아니면 직분 때문입니까? 아니면 교인 사이의 인간관계 때문입니까? 그 어떤 이유가 때문이 아니라, 영생의 말씀 때문에 교회에 남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는 영생의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영생의 말씀 때문에 교회에 남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실망감을 안겨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강단은 사람이 자기 말을 하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강단은 그 어떤 자리보다 두려운 자리가 되어야 하고, 떨림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떡과 물고기 때문에 따르는 사람입니다. 떡과 물고기는 현실적인 이익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이익 때문에 주님을 따르기도 합니다. 또 한 부류는 영생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따르는 사람입니다. 영생의 말씀은 하나님나라 자체입니다. 하나님나라 자체 때문에 주님을 따릅니다.
그런데 현실적인 이익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것을 얻은 후에는 주님을 떠납니다. 아니면 현실적인 이익을 얻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서면 주님을 떠납니다. 그러나 영생의 말씀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영생의 말씀을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통해서 영생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영생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수의 말씀입니다.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자는 너무나 상처가 많은 여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녀에게 더 이상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명수가 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수이신 주님을 만난 수가성의 여자의 행동이 어떠합니까?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고 외칩니다.
수가성 여인에게 있어 주님은 영생수가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남편 다섯이 있었던 여자이지만, 이제 영생수가 되시는 주님을 만난 이상 어디에 가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내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 주시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우리가 그 주님을 만난 이상 어디에 가겠습니까? 갈 곳도 없고, 가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영원한 생명수가 되시는 주님께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영생의 말씀은 거듭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의 사람을 어떻게 지으셨습니까? 땅의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셔서 살아있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사람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람은 영생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토록 살 수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강사의 말도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는 못합니다. 대통령의 말도, 세상에 어떤 권세자의 말도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영생의 말씀은 그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살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배운 것이 많고, 아무리 가진 것이 많다고 해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거듭나게 된 니고데모에게 있어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종교적 권세, 사회적 권세, 정치적 권세를 모두 가진 사람이었지만, 거듭나게 하신 주님을 만난 이상, 그런 권세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들은 내가 거듭난 사실 보다 소중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를 거듭나게 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주님을 만난 이상 어디에 가겠습니까? 갈 곳도 없고, 가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주님께로 가야 합니다.
69절을 보면, 베드로는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고백합니다. 베드로의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모르는 사람은 떠난다는 말입니다. ‘거룩’ 이라는 칭호는 하나님께만 붙일 수 있는 칭호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는 고백입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어떻게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도 모두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대단한 기적을 행하는 선지자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영생의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영접했습니다. 이러한 고백이 제자들로 하여금 주님을 쫓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도 내게 영생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오늘을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영생의 말씀 때문에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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