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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6장,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by 영구한도성 2022. 7. 24.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2 모든 것이 내게 可하나 다 有益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可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13 飮食은 배를 爲하여 있고 배는 飮食을 爲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廢하시리라 몸은 淫亂을 爲하여 있지 않고 오직 主를 爲하여 있으며 主는 몸을 爲하여 계시느니라
14 하나님이 主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權能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肢體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肢體를 가지고 娼女의 肢體를 만들겠느냐 決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娼女와 合하는 者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肉體가 된다 하셨나니
17 主와 合하는 者는 한 靈이니라
18 淫行을 避하라 사람이 犯하는 罪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淫行하는 者는 自己 몸에 罪를 犯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聖靈의 殿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自身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榮光을 돌리라

 

 

본문의 결론은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입니다. 이 결론의 대 전제가 있습니다. 우리 몸은 성령의 전이기에 하나님은 우리 몸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육체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는 연약함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맞습니다. 우리는 연약하므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늘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나쳐서는 안 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가 또 다른 죄를 짓는 빌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죄를 지어도 다음에 회개를 하면 되지!” 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참다운 회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참다운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더 나아가서 참다운 회개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겠다는 적극적인 소망입니다.

 

로마서 6장 1절과 2절을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더 이상 죄와 사망이 왕노릇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이 더 이상 왕노릇하지 못한다는 것은 장차 일어날 일이 아닙니다. 죄와 사망이 더 이상 왕노릇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에게 지금 실현된 영적 사건입니다. 이 영적 사건으로 인해 이 세상에서도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성령 안에서 부여된 것입니다.

 

육체의 연약함에 대해서 생각할 때 두 가지 방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은 연약하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죄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무장해제를 합니다. 또 하나는 사람은 연약하기 때문에 전능하신 주님께 더욱 의지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연약함에 대한 인정은 같지만 방향성이 다릅니다.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는 것은 전능하신 주님께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전능하신 주님께 의지한다면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대상으로 고린도전서를 쓴 이유 중 하나는 육체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린도는 헬라의 고모라 성이라고 불릴 만큼 부패하고 타락한 도성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아프로디테 신전과 같은 이방 제단이 있었습니다. 상업의 중심지였으므로 음주문화가 발달했고, 성적으로는 매우 문란한 곳이었습니다.

 

헬라어로 ‘코린디아조’ 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고린도인처럼 행하다.’ 는 말입니다. 당시 ‘고린도인처럼 행하다’ 는 말은 곧 ‘매춘 행위’ 를 뜻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도 이렇게 부패하고 타락한 문화적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성적인 방종과 타락이 심각해도 교회가 이를 묵인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애찬식도 술 취한 상태에서 참석하여 교회질서가 문란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성이 이렇게 부패한 것은 헬라철학도 한 몫을 하였습니다. 헬라인들은 육체를 천시했습니다. ‘육체는 무덤이다.’ 는 속담이 있습니다. 에픽테터스라는 사람은 “나는 시체에 얽매인 불쌍한 영혼이다.” 고 말했습니다. 시체는 육체를 뜻합니다. 육체는 시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혼과 영이요 육체는 쓸모없다는 것이 헬라의 철학입니다.

 

이런 사상에는 두 가지 태도가 형성됩니다. 하나는 금욕주의입니다. 육체의 욕망이나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지 한다는 것이 금욕주의입니다. 또 하나는 쾌락주의입니다. 육체는 어떻게 되든지 상관이 없으니까 육체에 관해서는 무엇을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마음껏 만족시켜 줘도 좋다는 태도인데, 고린도에 널리 번졌던 것은 쾌락주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도 고린도에 널리 번져 있었던 쾌락주의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도 음행과 음주문제가 심각하였습니다.

 

심지어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이 설교한 ‘그리스도인의 자유’ 에 관한 교리를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만인들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인간이라면 무엇을 하든지 자유로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무가치한 육체를 가지고 무엇을 하든지 자유로운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바울이 설교한 ‘그리스도인의 자유’ 라는 것은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않고 그 자유를 가지고 서로 종노릇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인들은 고린도의 타락한 문화와 자기 욕망대로 해석하였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배는 식물을 위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식물과 배는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마찬가지로 육체의 본능을 위해, 성행위가 있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습니다.

 

여기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은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배도 식물도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배와 식물은 생물학적인 것입니다. 생물학적인 것은 지나가 버립니다. 머지않아 두 가지가 모두 없어질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인격적 존재로서 ‘나’ 라는 사람입니다. 전인격적 존재라는 것은 영과 영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전인격적 존재라는 것은 육체까지 포함합니다. 인격은 영과 영혼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은 육체와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실 때,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발라주시는 행위가 무엇입니까? 육체적인 행위입니다. 이 행위 속에 무엇이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사람의 마음이 따라줘야 하고, 인격이 따라줘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격은 육체와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음행의 문제에 대해 잘못 생각한 것은 단지 육체의 문제로만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육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의 문제이며, 영의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의 육체는 사람의 인격과 사람의 영과 깊은 상호작용 관계에 있습니다.

 

영의 문제는 육체의 문제로 나타나기도 하고, 육체의 문제는 영의 문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17절에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말씀합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있고, 저 세상에서 있어서는 더욱 긴말하게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전인격적 존재로서 ‘나’ 라는 사람은 구원과 더불어서 긴밀하게 그 몸이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24:39]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 다시 말해 살과 뼈가 있는 주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23절을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람이 음행을 저지를 때 어떤 일이 발생한다고 합니까? 그것은 창녀에게 자기의 몸을 맡기는 것이 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성교라는 것은 두 사람의 인간을 한 몸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인관계로 맺어진 성교 외에는 원칙적으로 허락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6절에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라는 말씀은 창세기 2장24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창세기 2장24절을 보면,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말씀합니다.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성도의 육체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것입니다. 음행은 그리스도의 것이어야 하는 육체가 문자 그대로 다른 것에 팔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18절을 보면, 음행이 다른 죄와 어떻게 다른가를 말씀합니다.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말씀합니다. 음행의 죄는 자기 몸에 대한 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할 육체에 대한 죄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음행의 문제가 심각하여 음행의 죄를 중심으로 편지를 썼지만 바울의 메시지는 단지 음행의 문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인 메시지는 ‘우리 몸은 누구의 것인가 하는 것이며, 누구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가?’ 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호소합니다. 음행하는 몸은 주와 합할 수 없고, 술 취하는 몸도 주와 합할 수 없으며, 세상쾌락에 자기 몸을 맡기는 몸도 주와 합할 수 없는 것입니다.

 

19절과 20절 상반절을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구원은 영과 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영과 혼과 더불어 육체까지 포함됩니다. 전인격적 구원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전체, 즉 영과 육을 모두 구원하고자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체 자체가 성령의 전입니다. 성령께서 거하시는 장소입니다. 육체 자체가 거룩한 성령께서 임재 해 계시는 장소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구원받은 영혼과 깨끗한 몸을 주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몸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몸을 육욕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신앙에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를 범하는 자유가 아니라 죄를 범하지 않는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 문화양식에 영향을 받습니다. 고린도교회가 그 도시의 음행과 음주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도 이 시대 문화양식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성(性)을 상품화하는 문화, 불륜적 사랑을 미화하는 것, 혼전 성관계의 보편화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죄악 된 시대문화에 휩쓸리지 않는 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 능력을 성령 안에서 주셨습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죄를 지었을 때 회개함으로 주님의 용서를 알게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은혜의 전부는 아닙니다. 사람이 육체나 본능의 노예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주님으로 부터 부여받았다는 것도 은혜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이 육체나 본능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주님께서 나를 값으로 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몸에 대해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에 대해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할 의무입니다. 우리 욕심과 정욕대로 살아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의 소망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받은 자유라는 것은 죄를 범하지 않는 자유와 더불어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영광 드리는 삶을 사는 자유입니다.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영광 드리는 것은 구속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자유는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삶을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죄는 그 사람에게 수치를 안겨주고 그 영혼과 마음을 결박합니다. 처음에는 달콤한 것 같지만 나중에는 결박당한 영혼으로 인해 고통 받게 됩니다. 그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 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영성에서 회복되어야 할 것은 죄의 결박에서 벗어나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삶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죄의 결박으로 부터 벗어납니다.

 

기도의 자리를 사모하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삶입니다. 기도는 영으로, 마음으로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몸으로 드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일종의 영적 노동입니다. 적지 않은 시간 기도를 하고자 할 때 몸이 힘들 수 있습니다. 몸이 힘들지만 참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하는 영혼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만 기도하는 몸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드림에 있어 몸을 통해서 다시 말해 삶을 통해서 영광드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