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도 못 들어간 예배당’ 이라는 예화를 들은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미국 북쪽지방에 살던 어느 흑인이 먼 지방으로 출장을 갔는데, 마침 주일이 되어 근처에 있는 교회로 예배드리려고 갔습니다. 예배당 계단을 올라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니까 문 앞에서 안내를 맡은 백인이 갑자기 문을 가로막으며, "당신은 여기 들어오지 못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이 흑인이 깜짝 놀라서 "왜 들어가지 못합니까?" 라고 물으니까 "여기는 백인들만 모여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라고 거절했습니다.
하는 수없이 그 흑인은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안에서 들려오는 찬송소리를 들으며 혼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비몽사몽간에 흰 옷 입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 흑인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입니다. "너는 어째 여기에 혼자 앉아 있느냐?" 묻자, 그 흑인은 예수님의 옷을 붙들면서 "예수님!, 저는 예배드리려고 이 교회에 왔는데 저들은 내가 얼굴이 검다고 해서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여기 앉아 있습니다."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흑인의 어깨를 다시 두드리면서 말씀하시기를 "너도 그 예배당에 못 들어갔느냐 나도 그 예배당에는 못 들어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래 전에 장애인 목회를 하시는 둥지교회 목사님을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 중에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목사님의 목회 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꿈은 “장애인 교회인 둥지교회와 같은 교회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이 꿈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애인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기성교회에서 장애인들을 받아주지 못하기 때문이지, 장애인 교회가 별도로 필요해서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론적으로 맞는 말이었습니다. 교회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건강한 자나 약한 자나 전혀 차별 없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함께 예배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부자도 없고, 가난한 자도 없고, 건강한 자도 없고, 약한 자도 없습니다. 단지 하나의 몸과 많은 지체로 이루어 진 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교회의 존재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그 존재 방식을 ‘하나의 몸과 많은 지체’ 로 정의를 내립니다.
12절에,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몸에 여러 지체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에베소서 2장 20절에서 22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와 우리는 성령 안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데,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됨을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5절을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말씀합니다. 여기서는 주님과 우리는 서로가 그 안에 거할 수 있는 관계로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종합적으로 보면, 여기서 두 가지 신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함께 지어져 간다는 것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거하실 처소가 된다는 것은 그 안에 거할 수 있는 관계임을 보여줍니다.
마치 한 사람의 몸속에 심장이나, 폐 등 내장 기관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객체가 됩니다. 객체가 무엇입니까?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작용하는 대상물이 되는 것이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객체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피를 물려주었지만, 부모가 자식 안에 거하고, 자식이 부모 안에 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촌’ 이라고 하는 부부도 그렇습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객체입니다. 사랑하는 부부가 서로의 마음에 대해서 이해하고, 부부 중 어느 한 쪽이 아프면 마음으로 그 아픔에 동참할 수 있지만, 상대방의 질병을 대신 앓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우리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는 존재입니다. 성령 안에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는 내 안에 거하십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객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가 됩니다. 내가 아프면 그리스도께서도 실제 아프신 것이 ‘완전한 하나’입니다.
완전한 하나가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인격적 교류입니다. 완전한 인격적 교류의 핵심은 진실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든, 부부 사이든, 서로에 대해서 100% 진실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진실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나는 100% 진실합니다.
진실하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다.’ 는 말이 아닙니다. 진실하다는 것은 ‘거짓말 하지 않는다.’ 는 것입니다. ‘죄를 범했을 때’ 내가 ‘죄를 범했습니다.’ 고 고백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진실의 관계성입니다.
누가복음 12장 1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말씀합니다. 사람은 연약함으로 인해 예수님을 거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해 회개를 촉구하는 성령의 음성을 거역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음성을 거역하지 않는 것이 ‘진실’입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성의 가장 핵심은 진실입니다.
‘하나의 몸에 많은 지체가 있다.’ 는 것은 하나의 존재를 이야기 하면서 동시에 하나의 인격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여러 인격이 존재한다면 ‘다중인격장애’ 가 됩니다. 한 사람에게는 단 하나의 인격만 존재하는 것이 건강한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하나의 인격만 존재합니다. 그 인격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그리스도만이 드러나야 합니다.
13절을 보면,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든, 어느 지역 사람이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든, 성령 안에서 동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동질성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드러나는 동질성입니다.
우리는 2013년 실천사항 중에 생활훈련으로서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서로 먼저 인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 이 어떤 사랑입니까?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인격이 드러나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이 드러나는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그리스도 때문에 하는 사랑이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보혜사 성령 안에서 실현되는 사랑이며,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아 하는 사랑이 그리스도의 인격이 드러나는 사랑입니다.
지금은 그 어느 시대 보다 개인의 개성을 강조하는 시대입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도 자신을 차별화 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는 것입니다. 미래 첨단 광고기술에 있어서도 개인의 개성을 반영하는 것이 방향성 중에 하나입니다. 지금 TV광고는 한 가지 제품에 대해서 불특정 다수인에게 그대로 전달되지만, 미래 광고 기술에서는 한 가지 제품에 대해서 특정한 개인에게 그 광고 내용이 맞춤식으로 전달됩니다.
이를테면 삼성 스마트폰을 TV를 통해 광고하는데, 광고 자막에 지금 TV를 보고 있는 고객의 이름이 뜨는 것입니다. 그리고 광고의 내용은 그 고객의 기호를 충분히 고려한 내용으로 장식을 합니다. 이것이 미래 광고 기술의 방향성이고, 매체 문화가 그런 방향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환경 속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주장한다면 얼마나 찬밥신세가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인격만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드러나야 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망이 드러나야 하며, 그리스도의 겸손과 그리스도의 인내가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시대조류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시대조류를 해석하고, 진리와 비진리를 가리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기준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오직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고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 ‘오직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3절을 보면,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말씀합니다.
새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이 빛이 되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시는 성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곧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 곧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빛이 되시고 어린양이 등이 되시는 곳입니다.
등대는 바닷가나 섬 같은 곳에 탑 모양으로 높이 세워서 밤에 다니는 배에 뱃길이 어디인가 보여주고, 위험한 곳 따위를 알리기 위해 불을 켜 비추는 항로 표지입니다.
교회를 등대에 비유한다면 참 등대 되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비치는 교회가 등대되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치는 교회가 영적 항로를 정확히 보여줄 수 있고, 위험한 곳이 어딘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건물도 그리스도께서 비치지 않으면 교회가 등대 되지 못하지만, 아무리 초라한 건물도 그리스도께서 비치면 교회가 등대됩니다. 많은 문화교실 프로그램이 있고, 현대인의 수요와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시설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리스도께서 비치지 않으면 교회가 등대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산골짜기 교회에 2~3명의 노인이 모여 예배드리는 장소라 해도 그리스도께서 비치면 교회가 등대가 됩니다.
개인의 삶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풍성하고 행복한 삶을 산다고 해도 그리스도가 빠진 인생은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빈궁한 삶을 산다고 해도 그리스도가 함께 한 인생은 모든 것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성도의 삶도 그렇습니다. 성도의 신앙의 기준은 이적과 기사가 아닙니다. 성도의 신앙의 기준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심지어 내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늘의 만나를 먹는다 할지라도 주님의 살과 피를 먹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늘의 만나를 먹어도 죽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하늘의 만나를 먹었다’ 는 것은 표적입니다. 그 표적이 가지고 있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만나를 먹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그것을 빌미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기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위에 더 충만해야 할 것은 등이 되시는 어린 양,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위에 더 충만해야 할 것은 등이 되시는 어린 양,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율법에 정통했던 바리새인들이 놓치고 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라.’ ‘무엇을 하지 마라.’ 라는 조항에만 매여 있었지, 율법의 근본정신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나무랄 때, 나무라는 것에만 목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나무라는 것은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고, 이것이 부모의 마음임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자식을 나무라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또 하나의 방편인 것입니다.
율법이 그런 것입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들어가 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인격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곧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서기관이 계명에 대해서 물었을 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말씀하십니다. (막12:30,31)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한 마디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으로 정의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해석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것을 찾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이 주님의 사랑 가운데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입니다. 설사 나의 삶이 현실적인 고통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나의 삶이 주님의 사랑 가운데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나의 삶이 주님의 사랑 가운데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신뢰입니다.
우리가 요지경과 같은 이 세상의 수많은 사건들도 다 이해하기 힘들고 해석하기 힘든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앙인으로서 더 중요한 것은 그 뜻과 섭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는 과정이라기보다 주님의 인격에 대한 깊이가 더해가는 과정입니다. 참으로 주님이 나의 신랑이 되심을, 참으로 하나님은 탕자와 같은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가 되심을, 참으로 주님은 방황하는 양떼와 같은 우리를 찾으시는 목자가 되심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그 분의 지체가 아닌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가 그 분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절에서 26절 까지를 보면, 하나의 몸과 많은 지체의 관계성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27절에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 분의 발이며, 우리는 그 분의 손이며, 우리는 그 분의 귀이며, 우리는 그 분의 눈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 분의 지체이기에 그 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의 발이기에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며, 우리가 그 분의 손이기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며, 우리가 그 분의 귀이기에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우리가 주님의 눈이기에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살든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방식이고 본질입니다.
성도들은 많은 것들로 인하여 고민하지만 결국 하나입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많은 것들로 인하여 방황하는 것 같지만, 사실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관념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단 하나의 몸 곧 그리스도의 몸과 연결된 실제적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랑을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심으로 실현하셨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는 말이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언약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이단은 논쟁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신학적인 지식이 부족해도 그리스도가 누군가를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지체인데,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분의 지체인가?” 하는 존재론적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신학적인 해박한 지식이 있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그 한 가지 사실만 붙들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일곱 귀신 들렸다가 놓임을 받았던 막달라마리아가 만난 주님, 사마리아 여자가 만났던 생수를 주신 주님, 고기를 전혀 잡지 못하다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히는 것을 보면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 고백했던 시몬 베드로가 만났던 주님, 이들이 만났던 주님에 대해서 무슨 논쟁이 필요하겠습니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에게는 이미 주님은 그 사람에게 있어 인생의 모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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