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말씀의 내용은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는 것입니다. ‘거룩’ 이라는 것은 ‘구별되다.’ 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선 하나님은 창조주시기에 피조물과 구별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무 흠도 없으신 성결하신 분이시기에 죄인들과 구별되십니다.
원래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게 지음받았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말씀합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것은 사람을 다른 피조물과 구별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되었습니다. 다른 피조물과 차이가 없어졌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로마서 1장 23절에서는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사람은 범죄로 인해 새와 다를 바 없어졌고, 짐승과 다를 바 없어졌으며, 기어다니는 동물과 다를 바 없어졌습니다. 범죄는 이처럼 사람을 비천하게 만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사람의 인생은 살았으나 죽은 목숨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사람의 인생은 호화저택에 멋진 자가용을 굴리고 떵떵거리며 살아도 가장 천한 인생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사람의 인생은 설사 착하게 산다고 해도 그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성경의 대전제가 있습니다. 일단 성경은 도덕이나 윤리가 그 목적이 아닙니다. 성경의 대전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연결된 인생으로 살게 하는 것이 성경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인생으로 새롭게 시작할 때 그 사람의 인생은 비로소 사람다운 삶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으로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다시 입게 하셨습니까?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13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댜.’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14절과 15절을 보면,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하던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인되었을 때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옷을 입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그 행실이 나타납니다. 정장차림을 하면 품위있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지만, 예비군 옷을 입게 되면 아무데나 침을 택택 뱉고, 아무데나 소변을 보기도 합니다. 세상에 속한 옷을 입고 있으면, 세상사람으로 행동하지만,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면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행동합니다.
행실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몸으로 움직이는 행실이 있고, 마음의 행실이 있습니다. 몸으로 움직이는 행실은 행함이고, 마음의 행실은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2장22절을 보면,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말씀합니다.
행함과 믿음이 따로 가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이유는 하나님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인정받으려면 속이지 않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거룩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1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으로 지내는 것이 이러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입니다.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 곧 겉으로 드러나는 행실과 마음의 행실을 심판하시는 아버지 앞에 서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음성을 들었다.’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고 있는데 글자가 튀어나오는 것을 체험했다.’ 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원에서 기도하는데 놀라운 성령체험을 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환상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믿음을 가지게 되는 통로이거나 믿음을 가지게 하는 매개체일 뿐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믿음의 실체에 대해 정의하자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느냐? 없느냐? 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죄에 민감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나그네로 있을 때 두려움으로 지내라.’ 는 것은 이 세상 삶이 나그네임을 알고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천국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는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천국소망을 가진 자가 이 세상에서는 두려움으로 지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대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내가 하고 있는 이 행위가, 나의 행동과 마음의 행실을 하나님께서 과연 기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고 있지 않다는 판단이 들면 그 자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나그네로 있을 때 두려움으로 지내는 삶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나 쉽게 면죄부를 줍니다. 그러나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구속의 은총을 의지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구속의 은총을 의지하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죄에 대해 혹독합니다. 이 죄가 하나님을 얼마나 슬프시게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그 죄에서 돌아서려고 합니다.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은 이와 같은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회개하는 사람에게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있습니다. 성령 충만의 역사가 있는 사람에게서 모든 행실에서 거룩하게 되는 열매가 있습니다. 모든 행실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행실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그 능력을 믿는 사람에게서 드러나고, 성령의 능력은 회개하는 사람에게 불 일 듯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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