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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베드로전서

베드로전서 2장,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by 영구한도성 2022. 7. 30.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1 그러므로 모든 惡毒과 모든 欺瞞과 外飾과 猜忌와 모든 誹謗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기들 같이 純全하고 神靈한 젖을 思慕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救援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主의 仁慈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擇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神靈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神靈한 祭祀를 드릴 거룩한 祭司長이 될지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단 하나의 이유를 든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신학적인 관점을 배제하고 단 하나의 이유를 든다면 천국에 가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19장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나이가 어릴수록 사람은 단순하게 믿고,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천국은 누구의 것인가 하면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믿고,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어린 아이들 보다 더욱 어린... 갓난아기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2절을 보면,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고 말씀합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 무엇입니까? ‘순전한’ 젖이란 다른 어떤 것과도 혼합되지 않은 어머니의 젖을 말합니다. 처음 태어났을 때, 아기는 어머니의 젖을 통해 영양을 공급받습니다. 소의 젖이나 이유식 보다 순전한 어머니의 젖이 갓난아기에게는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순전한’ 어머니의 젖이 갓난아기에게는 최고의 젖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순전한 젖은 곧 신령한 젖을 말합니다. 어머니의 젖만큼 갓난아기에게 신비로운 젖이 없습니다. 어머니의 젖은 갓난아기에게 있어 만병통치약이고, 예방약이며, 가장 맛있는 음식이며, 생명의 샘입니다.

 

마찬가지로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은 내 육체와 영혼의 만병통치약이며 예방약입니다. 내 영혼의 가장 맛있는 음식이며,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생명의 샘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4장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갓난아기들이 왜 젖을 사모합니까? 그것은 젖이 생명줄이기 때문입니다. 갓난아기들은 본능적으로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젖을 빨아야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줄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본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은(창1:27)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갓난아기들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듯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23절 부터 25절까지를 보면, 우리가 사모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23절에서 25절까지 저와 여러분이 다 함께 한 목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우리가 사모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거듭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현재 우리의 육체는 어떤 육체입니까? 이 세상에서 정해진 시간동안 살다가 나이 들고, 병들고, 썩어 없어질 육체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주름이 늘어나고 몸의 이곳저곳에서 고장이 나다가 죽어 없어질 육체입니다. 더구나 이 육체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육체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영혼, 하나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육체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영혼, 하나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육체는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집니까? 그것은 부활을 통해 주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부활의 씨앗입니다.

 

그래서 1장23절에서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영원 후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항상 있습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있었고, 세상이 끝난 후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만이 썩지 않는 씨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부활의 씨앗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빠는 것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사모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걱정, 근심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갓난아기에게는 걱정, 근심이 전혀 없습니다. 먹는 것에 대한 걱정, 입을 것에 대한 걱정, 오늘 어떻게 살까에 대한 염려가 없습니다. 내일 무슨 일이 발생할까에 대한 염려도 없습니다. 배고프면 울고, 잠이 오면 자는 것 밖에 없습니다. 참 단순하고 무식한 것 같지만 이것이 갓난아기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은 세상에 대한 걱정, 염려가 없어야 합니다. 먹는 것에 대한 걱정, 입을 것에 대한 걱정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 어떻게 살까에 대한 염려가 없어야 합니다. 내일 무슨 일이 발생할까에 대한 염려도 없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22절을 보면, “가시 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고 말씀합니다.

 

염려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 막히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막히니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에게 있는 모든 종류의 걱정과 염려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둘째는, 세상풍파 속에 쓰러지더라도 다시 하나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젖먹이 아기를 보면 발육이 덜 되었기 때문에 엉금엉금 기어 다니다가 쓰러지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젖을 빠는 입은 놀라울 정도의 힘을 발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배고픔을 느끼는 갓난아기는 엄마를 보채고, 엄마의 젖꼭지를 느끼는 순간 사생결단 하듯이 엄마 젖을 빱니다. 갓난아기가 엄마의 젖을 빠는 힘은 유축기로 뽑는 힘보다 세고, 어른이 빨아내는 힘보다 세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갓난아기들이 엉금엉금 기어 다니다가 쓰러지기 일쑤인 것처럼 우리도 세상 풍파 속에 쓰러지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설사 쓰러지더라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붙들듯, 우리는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배고픔을 느끼는 갓난아기가 엄마를 보채듯, 세상 풍파 속에 여러 번 쓰러지는 우리는 하나님을 보채야 합니다. 갓난아기가 엄마의 젖꼭지를 느끼는 순간 사생결단 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의 임재를 느끼는 순간 사생결단 하듯 달려들어야 합니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했을 때,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라고 사활[死活]을 걸고 기도한 것처럼 우리도 사활을 걸고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셋째는, 갓난아기의 심령을 가져야 합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기 위해서는 갓난아기의 심령을 가져야 합니다. 갓난아기처럼 깨끗하고 맑은 심령이 없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 고 말씀합니다. 갓난아기에는 악독이나 기만이나 외식이나 시기나 비방하는 말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갓난아기의 단계를 벗어나면서 부터 생기는 것들입니다.

 

어머니 외에 한 사람, 두 사람 알게 되면서 생기는 것들 입니다. 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고, 직장인이 되고, 사업가가 되면서, 이처럼 사람과의 관계성을 폭 넓게 맺어가면서 생기는 것이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들입니다.

 

설사 어른이라 할지라도 무인도에 산다면 그 마음 가운데 악독이나 기만이나 외식이나 시기나 비방하는 말이 없습니다. 악독을 퍼붓고, 속이며, 외식하며, 시기하며 비방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단이 심어주는 죄악들은 사람과의 관계성 속에서 만들어 내는 것들이 많습니다.

 

잠언 4장23절에서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고 말씀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성 속에서 가장 힘든 것이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성 때문에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의 말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을 지키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2절 하반절을 보면,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합니다.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것은 나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악독을 퍼 붓고, 기만하며, 외식하고, 시기하고, 모든 비방하는 말을 할 때 순간적으로 통쾌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내 영혼을 병들게 만들 뿐입니다.

 

3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고 말씀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것은 값없이 은혜로 구원받은 사실을 말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것은 십자가 구속의 사건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내가 주님의 대속의 죽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모든 죄악 된 마음을 버리고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일단 모든 죄악 된 마음을 버리면 그 마음이 텅 비어 버립니다. 깨끗하게 청소가 됩니다. 그런데 텅 빈 마음으로 그대로 두면 안 됩니다. 만일 그대로 두면 또 다른 죄악 된 마음이 들어오게 됩니다. 누가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의 속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11:24-26]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우리는 텅 빈 마음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 마음 가운데 순전하고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배하게 되고, 지배하는 영역을 더욱 확대해 갑니다.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때, 그 결과는 이렇습니다.

 

세상사람들은 돈을 사모하고, 쾌락을 사모하고, 세상향락을 사모합니다. 자기 영혼을 쾌락과 향락으로 채웁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많고 이렇게 사는 것이 멋있어 보이고 화려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 마지막은 영원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때,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4절과 5절을 보면, 그 영원한 생명을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씀합니까?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 되셨습니다. 산 돌은 마태복음 21장42절에서는 ‘모퉁이의 머릿돌’ 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11절에서는 ‘닦아 둔 터’ 다시 말해 ‘기초석’ 을 말합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0장4절에서는 ‘생명수의 반석’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산 돌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 가다 보면 사람들로 부터 버린 바 되기도 합니다. 가족이 나를 멀리하고, 친구가 나를 멀리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직장에서 사업관계 속에서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 속에 우리는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게 됩니다.

 

갓난아기는 엄마 젖을 빨다가 종종 잠이 들지 않습니까? 그리고 깨어납니다. 이것을 반복하면서 자라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며 매일 잠이 듭니다. 그러다가 깨어납니다. 그러면서 영적으로 자라납니다.

 

갓난아기가 자라고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자라고 있듯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가운데 성도들은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 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목마른 사슴이 시냇가의 시원한 물을 사모하고, 배가 고픈 갓난아기가 엄마의 젖을 사모하듯이 성도는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은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을 짓게 할 재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다른 것을 더 사모하게 되면 길을 잃게 됩니다. 시편 119편105절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