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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베드로전서

베드로전서 4장, 육체의 남은 때(남은 인생)

by 영구한도성 2022. 7. 30.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4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1 그리스도께서 이미 肉體의 苦難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甲옷을 삼으라 이는 肉體의 苦難을 받은 者는 罪를 그쳤음이니
2 그 後로는 다시 사람의 情慾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肉體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淫亂과 情慾과 술醉함과 放蕩과 享樂과 無法한 偶像 崇拜를 하여 異邦人의 뜻을 따라 行한 것은 지나간 때로 足하도다
4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極한 放蕩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異常히 여겨 誹謗하나
5 그들이 산 者와 죽은 者를 審判하기로 豫備하신 이에게 事實대로 告하리라
6 이를 爲하여 죽은 者들에게도 福音이 傳播되었으니 이는 肉體로는 사람으로 審判을 받으나 靈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1 Forasmuch then as Christ hath suffered for us in the flesh, arm yourselves likewise with the same mind: for he that hath suffered in the flesh hath ceased from sin;
2 That he no longer should live the rest of his time in the flesh to the lusts of men, but to the will of God.
3 For the time past of our life may suffice us to have wrought the will of the Gentiles, when we walked in lasciviousness, lusts, excess of wine, revellings, banquetings, and abominable idolatries:
4 Wherein they think it strange that ye run not with them to the same excess of riot, speaking evil of you:
5 Who shall give account to him that is ready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6 For for this cause was the gospel preached also to them that are dead, that they might be judged according to men in the flesh, but live according to God in the spirit.
 

 

 

사람의 삶을 영적인 측면에서 두 가지로 나누면 이렇습니다. 하나는 정욕을 따라 사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정욕을 따라 사는 삶은 성령이 없는 삶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은 성령께 순종하는 삶입니다.

 

정욕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없는 삶입니다. 이렇게 정욕을 쫓아 사는 사람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년 만년 살줄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고 병이 들어 이제 죽어야 할 날이 가까워 오지만 가진 재산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합니다. 죽기 직전 까지 이 재산이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기 직전까지 이 재산을 가지고 저 세상에 갈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이 정욕이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속성입니다.

 

명예나 권세는 어떻습니까? 명예나 권세에도 그 맛을 한 번 들이면 그 곳에서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은 그 마지막이 대부분 불행했습니다. 박정희대통령은 김재규로부터 사살 당했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법정에서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사면 받았습니다. 노무현은 정치적 압박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되고자 정치계의 인물들은 줄을 서 있습니다. 한시적인 권력이라도 그 권력에 마력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번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은 대통령이었던 시절에 대한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러한 것이 정욕의 속성입니다.

 

정욕은 이 세상에 끊임없이 소망을 가지게 하고 그 욕구를 채워줍니다. 그 욕구를 채워주면서 멸망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천년 만년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육체의 남은 때에 불과합니다.

 

육체의 남은 때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에게 진정한 본향은 영원한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육체의 남은 때는 하나님나라에 가는 날짜가 얼마 남았는가에 불과합니다. 마치 천국가는 기차역에서 기차에 타고 있다가 그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승객과도 같은 것입니다. 시간이 되어 기차가 출발하면 지금 밖에 보이는 세상의 광경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제가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니 시간의 속도가 2배로 느껴졌고, 아이를 낳게 되니 그 속도는 훨씬 빨라 졌습니다. 5년이 지나면 저도 50세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니 이제는 살아갈 날 보다 살아온 날이 많다는 것을 직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든다는 것이 그다지 슬프지는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산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 자는 육체의 남은 때가 얼마인지를 모릅니다.

 

그 남은 때의 양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그 남은 때의 양이 아니라 그 때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 때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다가 천국가는 기차가 올 때 미련 없이 그 기차에 오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구원받기 전까지는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했습니다.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과거에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삶이 끝났고 그러한 삶은 지나간 때로 족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은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듯이 같은 마음으로 육체의 고난을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는다 함은 육체의 소욕을 버리는 삶입니다. 1절을 보면, 이것에 대해 ‘마음으로 갑옷을 삼는 것’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는 것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우상숭배가 삶을 즐기는 방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것들은 자기 영혼을 공격하는 화살들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것들을 버리는 것, 육체의 소욕을 버리는 것은 갑옷을 입어 그 화살들을 막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에게 있어 그리스도인은 참 재미없게 사는 사람들 같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성탄절에 영화관에서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있을 때, 교인들은 지루하게 보이는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친구들을 만나 희희낙락하고 있을 때, 교인들은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시간을 들여서 그것도 무급으로 일을 합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별나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어리석게 생각하는경향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십일조 생활을 하고, 교회봉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본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기하기도 하고, 적당하게 신앙생활 하지? 라고 혼자 생각하기도 합니다.

 

4절을 보면,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말씀합니다. 즉 적극적으로 육체의 고난을 받고자 하고, 방탕한 삶으로부터 그 삶의 방향을 돌리는 사람들을 이상히 여겨 비방한다고 합니다.그들이 이상히 여기고 비방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리석은 삶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자 가정에서 어떤 가족이 믿게 되었을 때, 어떤 말로 핍박합니까? “예수 믿으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라는 말로 핍박합니다. 즉 얻을 것이 없는데 왜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5절을 보면, 무엇을 경고합니까?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말씀합니다. 심판의 주님께서 일일이 그들의 죄를 열거하지 않아도 당사자들이 이실직고(以實直告)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들이 방탕의 삶을 살았음을, 그리고 그 삶이 잘못되었음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옳았음을 이실직고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태여(일부러 애써) 뭐가 옳니? 그러니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모든 것을 이실직고 하는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영광의 날이 될 것인가? 그 날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날이 될 것인가? 이것만 우리들에게 남아있을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영광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실직고 할 때, 때는 늦은 것입니다. 때가 늦기 전에 무엇을 받아들여야 합니까?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은 육체로는 심판을 받고,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는 것입니다.

 

6절에 ‘죽은 자들’ 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네크로이스’ 라고 하는데, 이것은 문자적으로 ‘육체의 기능을 잃은 자’(롬4:19)나 ‘죽어 저승에 있는 자’ (계20:12)를 뜻합니다. 그리고 ‘네크로이스’ 가 비유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허물과 죄에 속한 자(엡2:1), 행함이 없는 믿음, 곧 죽은 믿음에 있는 자(약2:17,19)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비유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지금은 살아 있으나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머지 않아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게 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러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 가운데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영접했다 함은 그 전의 상태가 원래 죽은 자의 상태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복음을 영접함으로 산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이끄는 삶이라는 것은 죄와 허물에 대해서는 죽고, 영으로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은 성령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는 영이십니다.

 

마지막 날 성령은 두 부류의 사람에게 각기 다른 역할을 하십니다. 복음을 거부하고 끝까지 방탕의 삶을 산 사람에게 성령은 그들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십니다. 반면 복음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 사람에게 성령은 그들의 무죄를 증명해 주는 증인의 역할을 하십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육체를 따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있는 사람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게 됩니다. 성령의 소욕은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갈망을 일으키고, 성령의 소욕은 끊임없이 이 세상의 죄를 끊게 하십니다. 우리들에게는 과연 이러한 성령의 소욕이 있습니까?

 

만일 내 안에 끊임없이 성령의 소욕이 일어나고 있는데, 지금까지 그것을 거부하며 살았다면 지금이라도 우리는 그 성령께 굴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데로 이끄는 그 분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